모압의 심판 (사 15:1-9)

"모압에 관한 경고라 하루 밤에 모압 알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며 하루 밤에 모압 길이 망하여 황폐할 것이라 그들은 바잇과 디본 산당에 올라가서 울며 모압은 느보와 메드바를 위하여 통곡하도다 그들이 각각 머리털을 없이 하였고 수염을 깎았으며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전사가 크게 부르짖으며 그 혼이 속에서 떨도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귀인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로 도망하여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부르짖으니 니므림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었으며 연한 풀이 말라 청청한 것이 없음이로다 그러므로 그들이 얻은 재물과 쌓았던 것을 가지고 버드나무 시내를 건너리니 이는 곡성이 모압 사방에 둘렸고 슬피 부르짖음이 에글라임에 이르며 부르짖음이 브엘엘림에 미치며 디몬 물에는 피가 가득함이로다 그럴지라도 내가 디몬에 재앙을 더 내리되 모압에 도피한 자와 그 땅의 남은 자에게 사자를 보내리라"

제가 성경을 말하다 보면 목사들과 부딪히는 일이 많습니다. 이것은 저뿐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정직하게 그리스도만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스스로 많은 갈등과 당황함 속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주위를 돌아다 볼 때 자기와 같이 성경을 말하는 자가 드물고 거의 모두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흘러 내려오던 그 방식 그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오히려 정직하게 복음만 말한다고 하는 자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을 때 혹시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이라면 듣는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한데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는 갈등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에 대한 그러한 반응은 지금 시대에 보여지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아니 훨씬 그 이전에 선지자시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던 복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면 왜 정직하게 그리스도만을 말하는데 거부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사람은 관심이 그리스도에게 있고, 십자가에 있고, 영생에 있고, 영원한 나라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십자가가 아닐 때에는 필연코 그리스도의 말이 아닌 것이 나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관심이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말하면 거부합니다. 관심이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면 거부합니다. 물론 단순히 십자가를 말하면 듣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포기하고, 자기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십자가를 말하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인데 어떻게 세상 것을 포기하는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부흥을 원하시는데 교회 부흥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말과는 다른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는데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의 복을 받는다는 거짓된 약속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회 일을 열심히 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요 6:29) 교회 일을 열심히 해야 충성된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에다가 다른 여러 가지 것을 첨가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고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말한다고 하는데 성경과 다른 복음이 나오는 것은 관심이 다른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관심을 두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고 계셨다면 말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지금 많은 교회가 말하는 대로 '나를 잘 믿으라 그러면 복을 주겠다'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판과 회개만을 외치셨습니다. 세상 것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고 하셨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염려하고 구하는 것은 다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마 6:31-32). 부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9:23). 넓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마 7:13-1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마 16::24). 이런 말씀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다른 말이 나옵니까? 다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는 정반대의 말을 하면서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거짓된 것입니까? 성경이 거짓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없는 말을 하는 자가 거짓을 말하는 거짓선지자임이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구하면 주시는데 왜 기도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칩니다. 부자는 천국에 못간다고 하셨는데 교회에서는 교회 봉사하고 십일조 하면 만 배나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과는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은 관심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영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기 때문에 영생에 대해서 말을 해도, 구원에 대해서 말을 해도 그것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무엇 때문에 세상이 듣지도 않는 말을 해야 합니까? 그 길은 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망하는 길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렇게 힘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리 말하든 저리 말하든 그리스도라는 말만 들어가면 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저 자신부터도 말을 바꾸겠습니다. 이렇든 저렇든 교회만 나오고 예수 믿는다는 말만 하면 천국 간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는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만 마지막이 절대 같지 않습니다. 이것 하나 때문에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지막이 다르기 때문에 말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구원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의 책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모두 우리의 구원과 연관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경전이 아닙니다. 소위 경전은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인간의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성경에서 도덕을 말하고 도덕적인 인간을 강조한다면 굳이 성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복을 받은 것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오히려 구원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성경은 망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이 땅에 남겨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는 채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그야말로 재미없고 무의미하고 부담 가는 책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세상의 복에 성경을 연관지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을 볼 때는 언제나 우리의 구원과 연관지어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도 비록 옛날 모압이란 나라에 대한 심판의 경고이지만 모압 한 나라의 심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계시해 주는 내용으로 봐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압의 심판을 보면서 '아하, 모압이 저래서 심판을 받는구나'를 찾아서 우리는 모압의 길로 가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이러한 얘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방 나라가 심판 받고,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들이 심판 받았던 그 길로 가지 말라는 것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벨론의 심판도 들었고, 앗수르의 심판도 들었고, 블레셋의 심판도 들었습니다. 바벨론의 심판은 교만 때문입니다. 나라의 부강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힘을 제일로 여기는 교만이 심판의 원인입니다. 결국 바벨론의 심판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되는 것을 의지하면 망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앗수르나 블레셋도 다같은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방 나라에 대해서 심판을 경고하는 것과 모압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이 분위기가 조금 다릅니다. 5절에 보면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라는 말이나 16:11절의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라고 하는 말을 보면 이사야는 모압의 심판에 대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이방 나라의 심판과 다른 점입니다.

이 이유를 알려면 모압이란 나라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알면 됩니다. 모압이란 나라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그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같이 멸망해야 할 인간이었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로 인해서 구출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롯의 부인은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롯의 두 딸이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서 롯에게 술을 먹이고 같이 동침해서 낳은 아이가 하나는 모압의 조상이 죄었고, 또 한 아이는 암몬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결국 모압과 이스라엘은 전혀 남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모압은 서로 형제처럼 잘 지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민2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면서 전쟁을 합니다. 호르마란 곳에서 가나안 사람과 싸워 이기고 아모리를 이기고 바산을 이깁니다. 그리고 22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는데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거민을 하나하나 물리친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이 자기들도 치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발락은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모압의 죄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대로 모압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 아브라함 때문에 존재하게 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모압은 항상 자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 나라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흐르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아난 족속이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선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발락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 족속임을 잊어버렸다는 것이 됩니다.

모압이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이스라엘을 왜 저주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축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도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축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그들이 저주 안에 거하게 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신 23:3-5절을 보면 모압의 심판의 이유는 이스라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것이 심판의 원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심판의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고 있는데 그 은혜를 무시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도 거부해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이 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세상이 복음을 영접하지 않도록 꼬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산다고 여기게 만듭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 말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상 것을 손에 쥐어줘서 스스로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은혜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고 세상에 눈을 돌릴 때 자연히 복음은 거부하게 되고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언제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주님을 영접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