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사 1:21-3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의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너희가 너희의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의 택한 동산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 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현대교회 신자들은 교회에 와서 뭔가 부담이 되는 말을 듣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서 사는 것도 힘들고 어렵고 많은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교회에 오면 그래도 마음이 가벼워지고, 세상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말을 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기쁨으로 해야 하는데 자꾸 부담이 되는 설교만 하면 신앙생활이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이 되어 버립니다'는 말을 한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앙 생활은 내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린 단지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지 내 기쁨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을 찾거나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출발부터가 잘못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 중심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자라갈수록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철저하게 무장해 갑니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은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깊이 박히게 됩니다. 내가 남의 기쁨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인간의 실체를 알지 못한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다면 결국 그가 찾는 하나님도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쪽에서 뭔가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해주지 않을 때 신앙 생활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고 결국 교회를 그만두게 되거나, 지금까지 해온 습관에 의해서 억지로 다니게 되거나, 타인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모습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은 내가 내 기쁨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만을 찾아갈 때 그 기쁨에 내가 동참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설교가 부담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기쁨을 위한 삶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기도를 해도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하면 기도할 맛도 나고 힘도 나는데 세상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니까 기도할 맛이 나지 않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고 부담만 됩니다'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위해서 기도해 왔는데 이제는 나 아닌 다른 존재의 기쁨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내 기쁨을 포기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내 기쁨을 포기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기쁨은 모두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 육신의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육신의 것을 통하지 않고는 기쁨을 누릴 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런 줄로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그럴 때 신자에게는 하늘에서 주어진 기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끝까지 자기의 기쁨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자기에게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힘든 일로 기쁨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기도를 해서라도 자기의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수없이 말해왔지만 결국 어떤 어려움으로 인해서 그 믿음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해 버리신다는 말에도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목적하는 기쁨은 오직 세상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에 대해서 친근감을 가지고 있고, 세상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심판 당하고 멸망당한다는 말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모습 아닙니까? 이들은 세상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힘을 세상을 잘되게 하는데 쏟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출애굽이고 믿음인데 여전히 세상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때문에 믿음다운 믿음이 보이지 않고 온통 죄의 모습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이 심판 당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렇다치고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신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시각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세상을 죄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을 죄로 본다면 심판 받을 장소로 본다면 결코 세상 방식대로 살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통해서 기쁨을 얻고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단지 '이스라엘이 잘못해서 심판 당하는구나 우리도 잘못한게 있으면 심판하시겠구나'로 그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로 심판을 범죄로 심판을 받는데 그 죄의 모습이 무엇인가? 그 죄가 오늘 나에게 있다면 그 죄에서 벗어나자. 왜냐하면 그것이 심판 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의 현재를 점검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든 망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변함없이 여호와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제가 좋지 않고 불황이고 살기가 어렵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라고 할지라도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변함없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가 염려가 되고 부담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되는데 자꾸 걱정하고 염려하고 울고불고하는 모든 이유가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없고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으니까 좋은 일이 없으면 기쁨이 없게 되고 짜증만 나고 신앙생활도 힘들고 재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자꾸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놓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염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평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서는 우리를 이런 삶으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이방인과 똑같이 자기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던 것입니다. 나라가 부강해야 자기들이 잘된다는 생각에 나를 부강 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하나님은 믿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 따로 나 따로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제사만 드려주고 제물만 바치면 그것으로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관심 없고 오직 자기들의 행복이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행복을 위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있게 하신 고아, 과부 같은 약한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는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하였습니다. 그것을 21절에서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라는 말을 통해서 살인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삶의 결과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고아, 과부를 신원하고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랑과 긍휼을 보여주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귀찮은 일이고,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던 이스라엘은 고아 과부를 무시하고 업신여겼던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편에서 원하는 것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이 주신 최선의 축복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23절같이 도적과 짝하게 되고 뇌물을 사랑하게 되고 사례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저기서 도적과 공모하여 공금을 횡령하고 사기를 치고, 자기의 자리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고, 당연한 일을 하고서도 뭔가 대가를 요구하는 모습들이 우리들 주위에서 너무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

습만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만연해 있는 모습입니다. 목사가 돈을 사랑하고 사례를 구하고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을 최선의 축복으로 여기지 않은 모습입니다. 언제나 자기편에서 더 나은 것을 원하다보니까 그런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의 패역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과 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의 모습입니다. 신자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면 살아가야 하는데도 더 갖고 싶어하고 더 편하게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언제나 부족을 느끼면서 나보다 많이 있는 자들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왜 망합니까? 살인 강도, 도둑, 사기꾼, 폭력배, 이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다 없애버린다면 세상은 망하지 않는 것입니까? 세상에 도덕군자만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심판해 버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를 사랑하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이유입니다.

자기 잘되는 것이 모든 소망이고 꿈이지 도대체 하나님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요?,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천국 보내실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 천국에 보내십니다.

사도 요한은 '나는 쇠하여지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요한과 같이 나는 망해도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잘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얼마나 하며 살아갑니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잘되는 것은 내가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웃으면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잘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서 기도하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며 기도한다고 해서 다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기도,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느냐 입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잘되기 위해서 기도하느냐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가 망하고 고통 당하는 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셔서 하나님을 잘되게 하는 신자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성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는 과연 어땠습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의 기도였습니까? 깊이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왜 우리 육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말을 굳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다같이 세상의 마지막을 아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상의 마지막을 믿지 않고 거부한다면 이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세상의 마지막을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는다면 이사야의 말을 절대로 흘려들어서는 안됩니다. 28절부터 보면 패역한 자 여호와를 버린 자는 멸망한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자비와 긍휼을 보이는 일에는 관심 없고 세상에 마음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패망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래도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소홀할 수 있습니까? 이제 남은 문제는 이런 멸망 속에서 살아남는 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공평으로 구속이 되고 그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회복과 구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멸망에서 살아나는 자는 회복된 자 구속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심판을 말하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구속을 말씀합니다. 회복, 구속은 은혜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한 죄용서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 심판의 세상에 구속주가 되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나를 구속하신 은혜에만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는 것은 죄용서의 은혜는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용서의 은혜만 있으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용서의 은혜입니다. 심판에 처한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삶의 차이는 세상에서는 몇십 년의 기간에 불과하지만 죽어서는 영원한 차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회복된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