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곳이 되라 (사 16:1-5)

"너희는 이 땅 치리자에게 어린 양들을 드리되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산으로 보낼지니라 모압의 여자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 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너는 모략을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오정 때에 밤 같이 그늘을 짓고 쫓겨난 자를 숨기며 도망한 자를 발각시키지 말며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자 앞에서 그 피할 곳이 되라 대저 토색하는 자가 망하였고 멸절하는 자가 그쳤고 압제하는 자가 이 땅에서 멸절하였으며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사람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관심에 대한 문제는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관심과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소위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산다는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구분을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한다는 일이 결국 자기 만족과, 자기의 높임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은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되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삶의 목적이 자신에게 있으면서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산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단지 자신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들이 기독교라는 종교 행위와 연관된 것이어서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합시다. 단지 그 행위만 두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목적이, 기도의 내용이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열심히 하는 것도, 예배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드리는 것도 모두 무엇을 위해서 하느냐를 따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자들이 예수님을 상상한다고 합시다. 과연 어떤 모습, 어떤 성격의 예수님을 상상하겠습니까?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는 예수님은 턱에는 수염이 멋있게 자라있고, 머리에는 광채가 나고, 얼굴에도 인자한 미소가 띄고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적어도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기준이 사람들의 윤리와 도덕을 바탕으로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소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시킨 사랑의 예수님이라면 적어도 이런 모습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서 전해져 온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의 옷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옷이 진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입으셨던 옷이라고 해도 그게 구원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것을 신자의 표준으로 삼고 그 모습을 닮으려고 애를 쓰기도 하지만 그것은 마귀의 장난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리의 탈을 쓴 양의 모습이다 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절대로 신자다운 모습, 예수님다운 모습을 여러분 멋대로 상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고 있는 것은 결코 신자다운 모습도, 예수님의 모습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듯 신자의 겉모습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겉모습에 관심 두지 마십시오. 겉모습에 관심 두고서 스스로 신자다운 모습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도 결국은 자기 완성에 대한 하나의 욕구일 뿐입니다. 그 욕구가 교묘하게 신앙으로 위장되어서 신자들에게 파고들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외모에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신자는 이래야돼, 예수님은 이랬을 것이야' 여기에 관심을 두게 되면 마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생각에 맞는 예수를 제공합니다. 소위 인자한 모습의 예수, 인품 좋은 모습의 예수, 그것을 가지고 예수상이라고 오해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고 그리스도를 닮고 싶다면 예수님의 외모가 아닌 그 정신에 관심을 두시기 바랍니다. 삶의 정신, 삶의 자세, 삶의 태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예수님의 모습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라 우리의 주위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분이 있다면 바로 그런 분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분의 삶의 정신, 태도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관심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삶의 정신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배우고 닮아야 할 것들입니다. 외모는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과 성격은 서로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얼굴에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도 삶의 정신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것을 말해줍니다.

지난 수요일에 모압의 심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모압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 덕분에 존재하게된 모압이 은혜를 은혜로 갚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위협이 된다고 해서 저주하고 멀리하는 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압의 심판에서 도피자가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가 모압의 도피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로 시작합니다. 1절에 보면 모압의 도피자를 딸 시온산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것은 결국 유다가 모압의 도피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지 모압의 도피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의도는 모압의 도피자를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것이 어떤 것임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유다에게 모압의 남은 자를 보호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지만 3절에 들어가면 상황이 바뀝니다. 지금 심판은 이방 민족에게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모든 자에게 내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유다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유다가 심판을 받을 때 유다에서도 남은 자, 도피자가 발생합니다. 그때 유다의 도피자를 모압이 보호하라고 합니다. 유다의 피할 곳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나의 쫓겨난 자들로 너와 함께 있게 하되 너 모압은 멸절하는 자 앞에서 그 피할 곳이 되라"고 합니다. 이 말씀대로 유다의 심판은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렘 40:12을 보면 그때 흩어진 유다가 도피한 나라 가운데 모압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할 곳이 되어주어야 할 존재의 모습입니다. 4절에 있는 대로 피할 곳이 되어주어야 할 존재는 토색하는 것이 없고, 힘으로 공격하고 압제하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힘이 없어서 쫓겨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토색하는 자, 멸절하는 자, 압제하는 자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오직 굳게 서는 것은 다윗의 장막뿐입니다. 다윗의 장막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계십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과 자비가 있습니다. 힘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의 장막은 힘이 있고 핍박이 있는 곳에서 쫓겨난 자들이 거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쓸데없이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신자다운 외모, 성격을 가지려고 하지 말고 힘에 의해서 눌림 받은 약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어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피할 곳이 되어주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겨야 합니다. 자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약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어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이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힘없는 자들, 쫓겨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어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에서는 세상의 자랑이 보여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힘이 보여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힘없는 자들이 상처를 입고 쫓겨나게 됩니다.

은석교회는 과연 약한 자의 피할 곳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은석교회가 강해서 그 힘으로 약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약자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은석교회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감으로써 모든 세상의 힘이 사라지고 은혜로만 살아가는 교회가 될 때 피할 곳이 되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피난처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시편 144편에 보면 여호와가 우리의 피난처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피난처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눈을 돌릴 때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안식처로 느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린 자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으로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는다면 세상에서 살던 방식은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서로 경쟁하고, 교회 안에서도 경쟁이고, 힘있는 자 힘없는 자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눌림 당한 자의 피할 곳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겉모습에 관심 두지 말고 교회에 와서 모든 것을 버리는 자가 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힘에 눌린 자들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교회 되는 것, 그것이 은석교회의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