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 산 (사 18:1-7)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갈대 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 경첩한 사자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도다 세상의 모든 거민,지상에 거하는 너희여 산들 위에 기호를 세우거든 너희는 보고 나팔을 불거든 너희는 들을지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종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 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버려서 산의 독수리들에게와 땅의 들짐승들에게 끼쳐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과하하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과동하리라 하셨음이니라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하며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서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

지난 시간에는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만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도 심판해 버리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긴장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도 심판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라 해서 무조건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마음을 가지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신앙 열심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열심은 이스라엘에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도 심판을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은 이유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자기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산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느냐를 보십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사는 것은 모두 심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몇 년을 다녔든, 봉사를 얼마나 했고, 헌금을 얼마나 했고, 기도를 얼마나 했든 그것이 여러분을 심판에서 보호하지 못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라고 하는 직책이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합니다. 평생을 예수만 믿었던 기독교 집안이라는 것이 여러분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머리속에서 뭔가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모두 지워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전 2:2절에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한 말도 예수님과 십자가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생각도 안하고 다 잊어버리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마음에 두고 산다는 것도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의미를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뭔가 긴장됨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이러한 얘기를 듣고도 마음에 긴장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나는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나는 천국 간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천국 지옥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나중 일보다는 우선 눈앞의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십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만 말씀 드리면 뭔가 모호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느냐 잊어버리고 사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걱정과 근심과 염려 속에 살아가는지 아니면 평안 속에 살아가는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평안 속에 사십니까? 걱정 근심없이 사십니까? 사람이 걱정과 근심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 사업에 대한 걱정, 직장에 대한 걱정 이런 모든 것이 자기가 바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해서 사회에서 뛰어난 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데 공부를 못할 때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업이 잘되어서 많은 돈을 벌고 싶은데 잘 안될 때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항상 잘되는 것, 높아지는 것, 성공하는 것, 이것만 원하기 때문에 실패가 두려워지고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걱정과 근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드렸지만 걱정 근심, 세상의 짐이라는 것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지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은 자식이 공부를 못하거나 똑똑치 못할 때 그것을 자신의 짐으로 생각합니다. 그 자식을 볼때마다 한숨과 걱정이 끊이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자신에게 짐을 안겨줬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욕심 때문에 스스로 짐을 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식 잘되는 것만 마음에 두고 있지 하나님은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하나님은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근심하고 걱정하며 사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천국을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공부를 잘해서 하버드를 나오고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자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면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돈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세상의 좋은 것을 다 누리고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멸망 받는다는 것을 잘아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런 신자가 세상사람과 똑같이 똑같은 것을 가지고 근심과 걱정 속에 산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자식이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그것은 타고난 대로 하는 것이고, 일이 잘되건 못되건 그것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갈 뿐이고, 오직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냐에 둘 뿐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은 자기의 편한 인생을 머리속에 두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을 머리속에 두게 될 것입니다.

신자가 해야 할 고민이라면 이것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는가? 혹시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앗수르의 심판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가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시면서 여전히 세상에서 잘 살아보는 것에 관심을 두고 나오셨다면 비록 수요일이어서 예배당은 나왔지만 앗수르가 심판을 받든 말든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의례히 하는 말로만 듣고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세상보다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면 앗수르의 멸망에 우리의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강대한 나라인 앗수르가 멸망을 당한다는 얘기입니다. 앗수르의 멸망을 구스의 사자를 보내서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멸망 역시 단지 앗수르를 징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멸망을 세상 모든 나라가 보라고 하십니다. 장대하고 힘이 세서 사람들의 두려움이 되었던 그 나라가 어떻게 망하는가를 똑똑히 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2,3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힘이 두려운 것 같고 굉장한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먼지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세상의 힘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강해지고 잘난 사람되고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다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세상의 강한 힘이 무너지는 것을 거듭해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겠습니까? 힘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강해지고 잘난 사람되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린 여전히 그리스도의 피흘리심보다는 힘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 결과가 걱정 근심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실패를 두려워하고 실패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기 때문에 언제나 염려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 모습입니다.

신자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 힘의 마지막 결과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의 체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걱정과 근심의 삶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7절입니다. "그 때에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의 장대하고 준수하며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서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 시온 산에 이르리라"고 합니다. 심판 속에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자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무엇을 교훈 받을 수 있습니까?

지금 이사야의 눈에는 앗수르, 바벨론, 애굽 이러한 힘센 나라들이 바람이 나는 겨와 같은 존재로만 보여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입니다. 힘이 되는 것을 가져야 행복할 것 같은데 없는 것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광야생활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애굽의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았던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이 염려와 걱정 속에 산다면 그것이 곧 광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을 가진 자가 부러워지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생활 속에서 빠져나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시온 산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시온산에 이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힘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걱정 근심없이 평안으로 사는 길입니다.

앗수르의 심판 속에서 예물을 가지고 시온산에 이르는 사람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결국 심판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일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광야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치시는 것입니다. 힘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라고 치십니다.

여러분, 힘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은혜로 살기를 힘쓰십시오. 그것이 시온산에서 사는 것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욕심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곳입니다. 고통과 염려와 근심만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시온은 평안이 있습니다. 욕심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기 때문입니다. 잘되든 못되든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인데 걱정 근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광야의 법칙으로 살지 말고 시온의 법칙으로 사십시오. 없는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주어진 것이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