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망성 (사 19:11-18)

"소안의 방백은 지극히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모략은 우준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너의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뜻을 알 것이요 곧 네게 고할 것이니라 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지파들의 모퉁이 돌이어늘 애굽으로 그릇가게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사특한 마음을 섞으셨으므로 그들이 애굽으로 매사에 잘못 가게 함이 취한 자가 토하면서 비틀거림 같게 하였으니 애굽에서 머리나 꼬리나 종려나무 가지나 갈대나 아무 할 일이 없으리라 그 날에 애굽인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이 그 위에 흔들림을 인하여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모략을 인함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몰라줄 때 부모 입장에서는 아주 섭섭한 마음이 들것입니다. 이것은 부모 자식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친구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줄 때, 또는 제자가 스승의 마음을 몰라줄 때, 또는 아내가 남편의 마음을,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몰라줄 때 사람은 자연히 섭섭한 마음을 가지게 되고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인간관계를 많이 겪으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상대방을 위해서 한 행동이었는데 상대방은 그런 마음을 몰라주고 오히려 오해를 하고 급기야 반감을 가지고 대응하거나 자신을 떠나버릴 때 그 아픈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식다운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친구다운 친구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부부도 서로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부부가 부부다운 부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일단 자신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읽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이로운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의 자연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서는 믿는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어떤 법에 대한 실천의 여부로서 따지려고 하지만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오직 실천하고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실천만이 법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법을 강조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실천을 강하게 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믿음은 법을 실천하는 정도로서 판가름 되어버립니다. 즉 법이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법을 실천하는 자가 의인이 되고, 실천하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 남아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장차 심판대에서 하나님은 법의 실천 여부를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지의 여부를 따지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여러분 묻겠습니다.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이제 갓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신 분도 있고 수십 년의 세월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면서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신자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이 어찌 보면 여러분을 무시한 듯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시간 심각하게 스스로 답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가지 예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예를 통해서 여러분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을 해 오셨는지를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오시면서 인생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많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일을 추진해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또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혹 '하나님, 왜 저에게 이렇게 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신앙생활을 잘 못해도 저렇게 하는 일마다 잘되면서 재미있게 사는데 왜 나는 이렇게 하는 일마다 꼬이면서 우환이 끊이지 않고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까? 원망을 하셨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린 그분의 자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녀된 신자에게 하시는 일은 모두 다 우리에게는 선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자신의 어려움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때 자연히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의 믿음은 어려움이 잘풀려가도록 도와주시기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어려움을 하나님의 일로 알고 그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럴 때 신자는 어려움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편안한 삶입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안식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이 안식을 빼앗긴 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데 과연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마음도 모르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을 통해서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린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산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19장도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19장의 내용을 읽어보시면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것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19장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9장 처음에는 애굽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나옵니다. 애굽이 어떻게 타락되어가고 어떻게 쇠약해지며 망해갈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19절부터 이야기의 방향이 전혀 다르게 진행됩니다. 19절을 보면 애굽땅 중앙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있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위한 제단은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19절은 애굽을 심판하시는 가운데 여호와께 경배하는 자가 발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고 합니다. 쉽게 이해가 안되는 말씀입니다. 실컷 심판하시고 나서 나중에는 '나의 백성 애굽이여 복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상식에서 생각하면 애굽은 도저히 하나님의 복에 들 수 없는 무리들입니다. 애굽이 어떻게 이스라엘과 함께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바로 이러한 점들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장망성이라 칭하리라"고 합니다. 장망성이란 '장차 망할 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이 성은 어떤 성이기에 장차 망하는 성이라고 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도성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현실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은 남에게 패배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패배라는 것은 곧 이 땅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가 그만큼 사라지고 약화된다는 뜻이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확대와 자기 이름의 창대를 인생의 모든 목표와 의미로 알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패배는 견딜 수 없는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남보다 앞서야 하고 앞서기 위해서는 나보다 약자는 철저하게 눌러야 하고 강자에게는 아부하면서 그 힘을 빌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이 세상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점차 망해가게 하시는데 그것이 2절부터 나옵니다. 2절에 "그가 애굽인을 격동하사 애굽인을 치게 하시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라고 합니다. 형제끼리, 이웃끼리, 성읍끼리, 나라끼리 싸우고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형제도 이웃도 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망성의 모습입니다.

불행해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일이 잘 안되고 쇠약해져가니까 우상, 마술사, 신접한 자를 찾아가서 자기들의 앞일을 묻습니다(3절). 불행을 극복하고 기어코 행복을 찾아보겠다는 어리석은 열심입니다. 이것이 장망성으로서의 세상입니다. 장망성에서는 돈이 없으면 기가 죽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힘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지식이라도, 돈도 지식도 없으면 번듯한 자식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기 위해서 애씁니다. 이것이 이미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로 살아가기 때문에 조그만 어려움만 생겨도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장망성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사는 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희생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장망성에서 희생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고난입니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한마디로 '고생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고생한다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희생하고, 져야하고, 무시도 당해야 하고, 양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자된 자가 살아가야 할 인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신자는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고집하십니까? 그것은 신자된 우리를 통해서 무엇인가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된 여러분이 세상에서 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살아가야 하느냐면 여러분 자신이 천국 가기 위해서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천국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은 단순히 애굽이 잘못했으니까 징계를 내리는 차원이 아닙니다. 고치시기 위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즉 심판을 통해서 누군가가 고침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실려 있는 것입니다. 23절도 보면 애굽만이 아니라 앗수르도 애굽과 마찬가지로 고침 받는 자가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심판 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아신다면 하나님이 왜 신자에게 어려움도 있게 하시고 고통도 있게 하시는지 그 마음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이나 앗수르에게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당해왔습니다. 힘있는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억누르면서 자기들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약자의 심정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장망성에서 힘이 없이 살고 남에게 맞고 눌림 받으며 산다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그런데 맞고 눌림 받으며 사는 것을 통해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이스라엘이고 오늘날의 신자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자가 평소에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압제하고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열심히 일했는데도 하는 일마다 꼬여서 항상 가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난하게 하신 것입니다. 부자는 이 가난한 자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무시하고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부자가 알거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럴 때 그 부자가 가난한 자가 되어서 남에게 무시를 당할 때 평소 가난한 자를 압제했던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가를 깨닫고 가난한 자의 심정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오게 될 때 그것이 구원 아니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신자에게 약자의 역할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역할을 싫어합니다. 결국 주님의 십자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멸시와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희생의 자리였습니다. 신자가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 멸시와 고통까지 내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신자들이 멸시와 고통과는 거리가 멀어있는 채 십자가를 말합니다. 약자의 위치는 절대로 거부하면서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 십자가입니다. 신자는 약자의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압제 당할 때 비로소 주님의 멸시와 고통에 눈이 뜨여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남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왜 나를 그렇게 낮추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는 오직 장망성에서 낮아지지 않기 위해서 열심입니다. 그 결과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장망성과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낮아짐은 애굽과 앗수르의 누군가를 복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희생의 마음이 없고 낮아짐이 없는 것이 장망성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비록 세상은 장망성이라고 할지라도 저와 여러분은 현실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면서 조그만 것도 나누면서 사랑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신자를 통해서 앗수르 애굽에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는 자가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