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역할 (사 20:1-6)

"앗수르 왕 사르곤이 군대장관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뵈이리니 그들이 그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을 인하여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그 날에 이 해변 거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교회가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내세우는 표어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을 통해서 교회의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정당성을 주지시킴으로서 교회에서 하는 일은 결코 반대하지 못하게 하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들을 보면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전혀 모른 채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남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이용해서 교회의 발전과 부흥을 꾀하고 그로 인해서 결국 인간의 영광과 인간이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잘못 생각합니다. 즉 자신이 영광 받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높아지고 잘되어서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이 기도하는 것도 결국 '하나님, 이번 일이 잘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주십시오'라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영광이 목적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라고 할 수 벗습니다. 자기 영광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내가 나를 낮출 때입니다. 나 자신을 낮추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높아집니다. 반대로 나를 높이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감소됩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사는 신자는 언제나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죄인 됨을 고백하며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임을 드러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는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 두고 하나님을 찾아 나오고 있으니 어떻게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점이 드러나고 수치가 보여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약점과 수치 되는 부분은 최대한 감춤으로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죄인된 인간의 본능은 부끄러운 것, 수치된 것은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죄인이라는 증거는 자신의 약점은 감추고 장점은 드러내려고 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본성은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자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약점이 없는 떳떳한 몸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적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신자로서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하나님을 찾고자 합니다. 신앙적인 자존심을 한껏 세워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떳떳해지기 위해서 열심히 종교행위를 합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리고 봉사도 부지런히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굴복 당하기 싫어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신자들을 다 이런 식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신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을 세워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부끄러움이 없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해라고 가르치는 것이 곧 떳떳한 인간, 즉 자존심을 세워서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왜 돈을 벌려고 합니까? 왜 배우려고 합니까? 돈이 곧 자존심이고, 지식이 곧 자존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남들보다 돈이 없거나 지식이 없으면 곧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돈을 벌고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남을 이기는 길이고 남을 이기는 것이 곧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가치관의 세계입니다.

돈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약점으로 생각하면서 그 부끄러움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도 있는 척하고, 뭘 몰라도 아는 척하면서 자신의 약점을 가려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허세'라고 합니다. 돈도 없으면서 여럿이 식사하러 갔을 때 식사비를 자기가 내려고 우긴다든지, 대화를 할 때 일부러 지식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이 지식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자기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감추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같이 약점은 가리고 자랑거리만 보이고 싶어하는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고 낮아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그런 부분들이 많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라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소위 '목사답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목사다운 모습에 장애가 되는 것은 가리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위선과 가식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자기에게 약점이 될만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것이 내 약점입니다. 하지만 이런 약점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음을 감사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목사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목사는 목사다워야 한다는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목사가 목사다운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보여져야 하는데, 복음은 뒤로하고 자꾸 외형적인 것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런 목사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목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낮아지지 않은 목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목사만이 아닙니다. 장로는 장로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합니다. 권사도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같습니다. 기도할 때도 자신의 자존심을 생각합니다. 결국 마귀가 어떻게 유혹합니까? 멋있는 기도, 남들이 감탄할 만한 기도, 자기를 돋보이기 위한 기도, 여기에 관심을 두게 합니다. '기도를 잘해야지'라는 생각에 빠지게 합니다. 기도만이 아니라 구제도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해서 합니다. 이런 유혹과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믿음의 길을 가는 신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라고 하셨는데 병든 자로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부 건강한 자로서 예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모습들이 멸망을 피할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신자로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의 약점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은 감추고 싶어하는 본성을 지녔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감추지 말고 드러낼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주 힘든 일을 시키십니다. 2절에 "곧 그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 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허리에서 베를 끄르라는 것은 겉옷을 벗고 속옷 차림이 되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신을 벗는 것은 노예처럼 천한 모습을 말합니다. 이런 행색으로 삼년을 살아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린 성경을 대수롭지 않게 읽고 있으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처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깊이 느끼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이 이사야처럼 3년을 지낸다고 생각해 보신다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실 것입니다.

이사야 입장에서는 온갖 수치와 멸시를 다 받아야 하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힘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신자로 사는 것을 쉽게 하시려고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안해서 신자로 사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사실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수치와 멸시와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사야에게 이런 일을 시키십니까? 단지 이사야를 고생시키기 위해서 3년을 신도 신지 말고 속옷 차림으로 다니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도구로 쓰이고 있는데 그것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즉 이사야의 행동은 애굽과 구스에게 어떤 예표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어떤 예표입니까? 이사야가 벌거벗고 다닌 것같이 애굽과 구스인들이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하여 수치를 드러내고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는 예표입니다.

4절에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끄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라고 합니다. 애굽은 부를 자랑하고 학문을 자랑하는 아주 교만한 나라였습니다. 부와 지식으로 인해서 인간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존재임을 전혀 알지를 못했습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 같이 자신들의 부요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린 부족함이 없다고 큰소리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앗수르로 인해서 온갖 수치를 다 드러내고 앗수르에게 끌려가는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예표로서 보여주는 것이 이사야가 3년 동안 겉옷을 벗고 신을 벗은 채 살아야 했던 이유입니다. 이것은 내 모습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의 모습이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사야가 벗은 몸으로 다닐 때 그것을 보고 '아하 저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냐'라고 깨달은 자가 있다면 그것이 진짜 기적일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가 애굽과 구스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들 앞에서 온갖 수치와 멸시를 다 당하신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치와 멸시는 바로 우리들이 받아야 할 것들이 아니었습니까?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인간이 수치를 받아야 할 부끄러운 자들인데 오히려 인간이 영광을 취하고 예수님이 수치를 당하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예수님은 수치와 멸시의 자리인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그 앞에 나오는 신자라는 이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아는 모습이겠습니까?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바로 수치와 멸시를 받아야 할 부끄러운 인간임을 알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그 신자는 자신의 수치와 멸시를 가리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러내면서 '나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존재다'는 것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도 주님이 다 덮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예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약점과 수치를 솔직하게 드러내려고 해도 '혹시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두려움이 자신을 가로막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인간의 자존심입니다.

6절에 해변의 나라는 유다를 가리킵니다. 유다는 앗수르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당시 힘있는 애굽을 의지하고자 했습니다. 애굽의 도움을 얻어서 수치와 멸시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애굽이 망하자 얼마나 실망을 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힘을 통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수치를 가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결과는 결국 실망만 남게 될 것입니다.

신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연약한 그 모습 그대로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치와 약점과 부끄러움을 스스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의 모든 수치와 허물을 가리워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일 것이고, 그런 신자는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앞세우거나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지 않고 언제나 낮아진 자리에서 주님만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

이사야에게는 자기 한몸 수치 당하고 멸시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다면 자기 한몸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내 한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감소되는 것보다는 내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더 못견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옷을 벗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잘난척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에게 더 관심을 두고 인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세상의 옷을 벗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그토록 입기를 원하는 돈 많다는 옷, 학벌 높다는 옷, 가문 좋다는 옷, 이런 옷들을 다 벗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자기를 낮출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점을 여러분께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세상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고 배우지 못한 것을 약점을 생각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서 자신을 가리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사는 집이 초라하다고 생각될 때 친구나 친지가 찾아오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결국 헛된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남의 집에 아파트가 몇 평인지 TV가 몇 인치인지 자가용이 어떤 것인지 냉장고가 몇 리터인지 이런 것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남들처럼 좋은 가구 들여놓고 비싼 가전제품 들여놓고 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자기 위신, 체면,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세상 것으로 자기를 치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고통이고 걱정이고 염려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볼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존재인가를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깨달으십시오. 항상 오늘에 감사하고 사십시오. 내일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염려입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고 멸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수치와 멸시를 받아야 할 자신임을 아십시오. 하나님이 망하게 하면 망하겠다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이 믿음이 여러분을 평안으로 인도할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아는 선지자 역할을 하는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