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숫꾼 (사 21:5-12)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숫군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너희 방백들아 일어나 방패에 기름을 바를지어다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숫군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 마병대가 쌍쌍이 오는 것과 나귀떼와 약대떼를 보거든 자세히 유심히 들으라 하셨더니 파숫군이 사자 같이 부르짖기를 주여 내가 낮에 늘 망대에 섰었고 밤이 맞도록 파수하는 곳에 있었더니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그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숴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 너 나의 타작한 것이여 나의 마당의 곡식이여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께 들은대로 너희에게 고하였노라 두마에 관한 경고라 사람이 세일에서 나를 부르되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숫군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뇨 파숫군이 가로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네가 물으려거든 물으라 너희는 돌아올지니라"

성경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무시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반면에 그 누구라 할지라도, 설령 그 사람이 살인 강도 짓을 해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죄수이든, 그보다 더 악한 일을 한 죄수이든 상관치 않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안다면 그 사람에게는 멸망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이 극복하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 안에서 살아갈 때를 전제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는 참으로 위대하며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긍휼과 용서 안에서 산다면 여러분은 그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복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는 수시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은혜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들은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휼과 용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채워지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모습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현재 기독교는 거의 대다수가 죄에 대한 긍휼과 용서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일이고 그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다음부터는 놀라운 육신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세상의 축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과정 정도로 격하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물론 외면적으로는 긍휼과 용서를 최고로 내세웁니다. 그러나 긍휼과 용서만으로 기뻐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용서 안에 육신의 복을 첨가하여 가르치기 때문에 결국 내면적으로는 긍휼과 용서보다는 복에 더 관심을 두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신자가 교회에 나오고도 육신의 복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분명히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회개를 해야 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로서 용서해주실 것인데 그 다음부터 하나님은 놀라운 복으로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했으면 반드시 그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증거는 예전의 잘못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회개란 예전의 잘못에서 돌이키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킨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자가 모든 관심을 하나님의 사랑에 두게 될 때 자연스럽게 세상에서의 자신의 욕망이 포기되어져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반대로 육신의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돌이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회개가 아니며 여전히 죄가운데 있는 모습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교회가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고 할 때 무엇을 죄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죄에서 돌이키라고 할 때 강조하는 것은 종교행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겨우 십일조 문제나 주일성수 또는 기도에 대한 부분, 나아가서 윤리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회개를 한다고 할 것이고, 그리고 십일조를 잘하고, 주일을 잘 지키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윤리적인 모습을 갖춤으로서 자신은 죄에서 돌이켰다거나 고쳤다고 생각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의 가장 안타까운 실상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에 대한 크나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십일조 안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일에 교회안나오고 새벽기도 안하고 금요 철야기도 안하고 교회 봉사 안한다고 싫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몸을 위해서 존재하려고 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셨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먹을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생명에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생명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인간에게서 가리워 버립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인된 인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소망을 두기보다는 자기 육신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게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발전과 성공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 채워지면 기뻐하고, 채워지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들면 낙심하고 원망하고 슬픔에 빠져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죄인된 인간은 모든 행동의 중심이 자기입니다. 모든 행동을 자신의 발전과 유익을 위해서 하게 됩니다. 종교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선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복을 주고, 육신의 문제를 도와주고 해결해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신자되게 하셨는데 우리가 복을 받을 준비를 하지 못해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사는 자들이 말씀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썩어지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에 불과한 몸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죄를 모른 채 제아무리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외쳐본들 그것은 헛다리짚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하심을 알고자 하신다면 먼저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죄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생명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면 다른 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지진이 나건 물가가 오르건 자식이 공부를 못하건 북한이 남침을 하건 상관없이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런 문제들이 여러분을 불안하게 하거나 신앙을 흔들어 놀 조건들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생명을 중심으로 살기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땅의 문제들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고, 항상 염려와 걱정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재미없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생명에 대한 관심은 상실된 채 천국을 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람 빠진 고무풍선이 하늘로 떠오르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오직 생명에만 관심을 둔 채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둠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어 세상에 빛을 비추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여러분조차 생명에 관심두기 보다는 세상 살림살이에 더 관심을 둔 채 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계시하는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파숫군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파숫군이라고 하니까 쉽게 '아하! 신자는 교회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을 파숫군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파숫군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20장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3년동안 속옷만 입고 맨발로 다녀야 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21장에서는 다시 요통을 겪어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음으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라고 합니다. 이사야가 이번에는 허리가 아프게 되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임산한 여인이 허리가 아픈 것 같은 아픔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이 요통 속에서 한가지 계시를 받는데 그것은 파숫군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가서 파숫군을 세우고 그 보는 것을 고하게 하되"라고 합니다. 파숫군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밖을 지키고 있다가 어떤 위험한 일이 일어날 징조가 있거나 일어났을 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파숫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파숫군과 파숫군이 아닌 자의 삶의 차이입니다. 파숫군은 안에 있는 자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파숫군이 아닌 자들은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안의 일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즉 자기들의 몸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파숫군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위험이 닥쳐와도 그것을 미리 경고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같이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파숫군을 세우라고 합니다.

1절에 보면 '해변광야에 대한 경고라'고 합니다. 해변광야는 바벨론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바벨론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그 누구도 자기들을 당해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나라가 엘람과 메대에게 망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주시면서 파숫군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밖에는 관심 두지 않고 자기들의 힘만 믿고 세상에 빠져 살다가 망한 바벨론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파숫군을 세우라는 것이다.

파숫군은 관심을 울타리 안, 즉 자신의 사람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이미 파숫군이 아닙니다. 파숫군은 항상 밖에 관심을 두고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위험한 일이 있을 때 안을 향해서 그 위험을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파숫군은 잠을 자서도 안됩니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도 밖을 살피는 시선을 거두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습니다. 거기서 잠을 자는 제자들을 향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깨어있으라는 것은 단지 잠을 자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관심을 주님의 십자가에 두라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마병대가 쌍쌍이 오나이다 그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 신들의 조각한 형상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하시도다"는 말씀도 파숫군을 세우지 않으면 바벨론이 망하는 것 같이 멸망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시대에 파숫군입니까? 바벨론의 멸망을 보면서 세상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를 깨닫는 자입니다. 그 자가 바로 깨어있는 자며 그 시대의 파숫군입니다. 노아의 시대에 파숫군은 노아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살아갔지만 노아만큼은 말씀을 신뢰하며 심판을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파숫군으로 살아가는 노아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결국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용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둠의 세상에서 파숫군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위가 모두 세상에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만큼은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두고 장차 이 땅에 주어질 심판을 의식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파숫군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단 한분이 파숫군으로 산다 할지라도 그분을 통해서 경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파숫군은 선지자의 고통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받으신 저주를 자기가 받아야 할 저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경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많이 하는 실수는 남이 안하면 나도 안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남은 안하는데 나만하면 괜히 화가 나고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도 안한다'라는 잘못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숫군의 자리에 서 있는 신자는 남이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합니다. 남이 안하니까 오히려 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깨어있지 않으면 나라도 깨어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십시오. 남이 나태하다고 해서 나도 나태해지고, 남이 게으르다고 해서 나도 같이 게을러지는 것은 같이 심판에 들어가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파숫군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단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경고를 받고 교회가 깨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마시고 '내가 파숫군의 역할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어둠의 세상에서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