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집의 열쇠 (사 22:15-25)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 내었도다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속박하고 장사 같이 맹렬히 던지되 정녕히 너를 말아 싸서 공 같이 광막한 지경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 있으리라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고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집의 아비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그 아비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항아리까지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파쇄되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기독교에 있어서 최대 관심은 천국입니다. 천국이 없는 기독교는 생각할 수도 없고 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소원하는 것은 신자로서는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천국에 대해서 무관심해져 갑니다. 천국에는 무관심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설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종교 놀이터로 전락되어버리고 하나님의 권위보다는 목사의 권위가 더 우위에 있는,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떠들어 대는 이상한 종교집단으로 변모해 버렸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욕심과 자존심을 한껏 부추겨주는 도구로 이용되어 버리고, 지옥이니 저주니 하는 말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단어로 여겨버리고 자신들은 천국행 티켓은 이미 확보해 놓은 것으로 자신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남은 것은 누가 지상에서 복을 더 많이 누리고 천국에서 상을 더 많이 받느냐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천국에 가는 문제는 전혀 심각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교회다니고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며 천국에 대한 심각성을 일축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죄인된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것을 그렇게 간단하게만 생각할 문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천국은 하나님 믿으면 간다'라고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살기좋은 곳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이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있는 것은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기쁘게 하고 다른 것을 다 잃어도 천국만 잃지 않는다면 괜찮다는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제를 간단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편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확률 제로입니다.

사람들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을 표현할 때 '확률이 얼마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주선을 발사할 때도 고장날 확률이 몇만분의 일, 혹은 몇백만분의 일이라는 말로서 확실성을 나타내곤 합니다. 하지만 확률 제로다라는 말은 쉽게 사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인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확률 제로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럼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은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죄인이 천국에 갈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열어 주어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아무나에게 열려지지 않습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늘의 문은 누구에게 열리느냐입니다. 누구에게 하늘의 문이 열리는지를 알아야 우리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인가를 점검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천국에서 살 수 있는 사람과 살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을 내세워서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한 그 모습이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나안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것도 그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기에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 이방인인 가나안 민족을 쫓아낸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도 나중에는 그 땅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그 이유는 그들도 약속의 땅에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전락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그 땅에서 살 수 있는 합당한 사람만 허락합니다. 누구만 허락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만 허락합니다. 그 외에는 누구라고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 약속의 땅입니다. 천국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이 누구를 거부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살피면서 천국에서 거부당하지 않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사야 22장이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에 '이상 골짜기에 대한 경고'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이상 골짜기'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는 신앙의 중심도시입니다. 그런데 그런 도시가 심판을 받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보다는 향락과 세상 즐거움에 빠져 살아갔습니다. 그러다보니 앗수르가 자기들을 공격하려고 하는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깨닫게 됩니다. 8절에 보면 "그가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라는 말이 유다가 그동안 보지 못하고 있는 위험을 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위기를 깨닫게 되자 어떻게 행동합니까? 수풀 곳간의 병기를 바라봅니다. 즉 자신들의 군사력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성의 무너진 곳을 점검하고 무너진 곳을 수리하기 위해서 가옥까지 헐어냅니다. 그리고 전쟁을 대비해서 먹을 물도 준비합니다. 이것이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책망하십니다. 11절에"너희가 이 일을 하신 자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자를 존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그들이 위기가 닥치니까 자기들의 군사력과 힘으로 위기를 이겨보려고 힘쓰고만 있지 지금 이 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은 전혀 바라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위기가 닥쳤는데도 하나님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채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인간의 힘으로 위기를 넘겨 보려고 하는 것은 잘못임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환난을 당하면 하나님보다는 눈앞의 인간적인 수단을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답답하니까 집이라도 허물어서 성을 단단히 쌓아서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만 하지 하나님이 이 일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경영하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이스라엘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아갑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살기 때문에 무슨 일만 있으면 그 일에 매여서 근심과 걱정에 빠질줄이나 알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깨달아갈 의도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처한 위기를 보게 하셔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에 빠져 살았던 잘못을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12절에 보면 "그 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하사 통곡하며 애호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이라고 합니다.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회개는커녕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라며 방종으로 나아갑니다. 이와 죽을바에야 실컷 먹고 싶은것 마음껏 먹고 즐길 것 마음껏 즐기다가 죽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으니까 눈 앞의 순간만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막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악은 죽기까지 속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가장 신다다운 태도가 무엇입니까?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 가장 신자다운 태도입니다. 피조물은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할 권리가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자기 뜻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주관자가 계십니다. 주관자의 뜻에 의해서 인생이 흘러갑니다. 피조물에게는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평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결코 용서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 인생을 주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시기 위해서 한 사건을 등장시키십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보면 '셉나'라는 사람과 '엘리아김'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셉나는 국고를 맡고 궁을 차지한 사람입니다.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람을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묘실을 팠기 때문입니다. 셉나는 묘실을 만들 수 없는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습니다. 아마 자기 권력을 믿고 왕족만 묻히는 곳에 묘실을 판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셉나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자기 위에 자신을 주관하는 주관자가 있다는 것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즉 왕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셉나를 쫓아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셉나의 자리에 엘리아김을 집어 넣습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은 엘리아김을 내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얘기가 무엇을 말하느냐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거부하시고 종으로 살아가는 겸손한 자를 용납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국은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만 용납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은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의지하고 살면서 천국에 간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아김에게 어떤 일이 주어집니까? 22절에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자가 없으리라"고 합니다. 즉 엘리아김은 천국의 문을 지키는 파수군의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천국의 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국의 문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천국의 문이 무엇입니까? 마 7장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문을 어떻게 말씀합니까? 좁은 문이라고 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다고 합니다. 좁은 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결국 지금 천국의 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다윗 집의 열쇠가 주어져 있습니다. 천국은 예수님만이 열 수 있고 닫을 수 있으며 아무도 그 일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보내기 위해서 주님이 부르신 자를 마귀가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쁨을 아십니까? 이러한 기쁨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천국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십자가를 체험한 사람들은 천국을 이미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사는 것입니다.

엘리아김이라는 인간이 다윗 집의 열쇠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엘리아김도 나중에는 결국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종으로 사는 자에게 다윗집의 열쇠를 맡기십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종의모습을 보여주었습니까? 오직 예수님입니다.

천국의 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알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의 문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 그 자리가 천국의 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만이 이 기쁨을 알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천국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문을 열어주시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없습니다. 주께서 세상을 어떻게 사셨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아무리 못산다 못산다 해도 주님보다는 낫습니다.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해도 주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아무리 애매하게 욕먹고 무시당한다고 해도 창조주이신 주님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한 것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자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산다면 못이길 것이 없는데 우리는 자꾸 내 자신을 마음에 두고 살기 때문에 힘들고 억울하고 상처를 입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언제나 겸손의 자리에서 살도록 하십시오. 어떤 일을 당하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며 사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자리가 천국의 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