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의 심판 (사 23:1-7)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선척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찌어다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 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깃딤 땅에서부터 그들에게 전파되었음이니라 바다에 왕래하는 시돈 상고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너희 해변 거민들아 잠잠하라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운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었도다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보장이 말하기를 나는 구로하지 못하였으며 생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 남자들을 양육하지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니라 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을 인하여 통도하리로다 너희는 다시스로 건너갈지어다 해변 거민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유하던 성이냐"

우리가 성경을 보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돈을 싫어하고, 권력을 싫어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이란 생각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나라는 모두다 부강하고, 돈이 많고, 문명이 발달한 그런 나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은 돈이 많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싫어하시고, 세상의 쾌락을 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느낌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에 대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그런데 23장을 보면 두로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나쁜 짓을 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두로가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로서 자연히 무역의 중심 도시가 되었고, 그러다보니 물질이 풍부해지면서 문명과 문화가 발달하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렇게 되면 두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발달한 문명과 문화를 누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러한 두로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이것이 고대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유하던 성이냐"라고 한 말씀에 두로를 '희락의 성'이라고 칭하여 부르고 있는 말씀 때문에 두로는 세상 희락을 누리고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은 인간이 세상의 희락을 누리는 것을 거부하신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모든 영광의 교만을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귀한 자로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이 말씀을 봐도 하나님은 세상 영광과 존귀함을 거부하신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영광과 존귀가 무엇입니까? 두로와 같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부귀영화를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가난하고 못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이다라는 잘못된 논리가 성립이 되버립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못배웠다는 것이 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부자로 산다고 해서 그것 역시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돈이 적은 자보다는 세상의 여러 가지 혜택을 좀 더 많이 누리면서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또 돈이 없다면 남들처럼 세상 것을 많이 가지지도 못하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돈으로 누릴 편리함도 누리지 못하면서 대신 불편함과 고생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서 돈 없이 고생했으니까 돈을 많이 가지고 살았던 사람보다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가산점을 더 얹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라는 불평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세상의 희락을 누리며 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룸싸롱 가면서 문란하게 사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아닙니다. 희락이란 꼭 술집가면서 여자들과 희희덕 거리면서 노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희락이란 즐거움입니다. 골프치고, 해외여행 다니고, 고급 자가용 몰면서 고급음식점 드나드는 것만이 즐거움이 아니라 여러분이 집에서 TV보면서 웃고 재미있어 하고 영화 보러 다니는 그런 모든 것이 다 희락입니다. 무엇 때문에 TV를 보고 영화를 봅니까? 모두 자기 즐거움을 위해서 보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다 세상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잘못이라면 우린 모두 세상을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문명을 버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을 버린다고 해서 즐거움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문명이란 인간이 즐거움을 누리는 하나의 도구이고 수단이지 즐거움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같이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때에는 또 그때 나름대로의 문명을 가지고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그 시대의 문명을 누리지 않는다고 해서 즐거움, 곧 희락을 버린 것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에게 즐거움이 되는 쪽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산속으로 들어갔다면 그 산에서라도 나름대로 자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즉 여전히 희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돈을 쓰지 않고 문명을 누리지 않는다고 해서 희락을 떠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락이 나쁘다 그러니까 희락을 누리지 마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희락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신자는 모두가 금욕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금욕이란 자신의 즐거움을 스스로 통제하고 절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로는 왜 심판을 경고 받아야 합니까? 12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 학대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두로를 바벨론에 망하게 하심으로 모든 희락과 평안을 빼앗아 버리시겠다는 말씀을 보면 분명 두로의 멸망의 원인은 희락인데 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희락 자체를 잘못으로 보지 않으신다면 왜 두로가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로가 희락을 누리지 않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역을 그만두고 부자가 되지 않고 문명의 발달을 위해서 힘쓰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희락을 누리는 것이 너무 지나쳤다는 것도 아닙니다. 희락이 지나치다 지나치지 않다는 기준을 어디에 둘 수 있습니까? 두로가 심판을 받은 이유는 한마디로 희락을 전부로 알고 살아간 것 때문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 것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세상의 재미를 누리며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불신자보다 금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희락 속에 살면서도 마지막이 있다는 것은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불신자와의 차이입니다. 즐거움을 누리며 살면서도 마지막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살기 때문에 마지막때 자신을 살리는 생명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희락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희락을 누리되 희락에 빠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두로의 잘못은 희락을 누린 것이 아니라 희락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 선지자가 외치는 경고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무엇 때문에 편안하게 즐겁게 잘 살아가고 있는 그들 앞에 서서 마지막을 외치고 있습니까? 희락이 전부가 아니고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선지자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희락은 나쁜 것이니까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희락이든 재미든 누릴 수 있으면 다 누려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 덕인가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재미있게 살아가지만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면서 살지만, 내 마음속에는 변함없이 주님이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세상의 희락을 누리고 사는 자들을 향한 경고가 아니라 희락이 전부이고 돈이 전부이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자신의 즐거움이 전부이다 보니까 마지막이 있음을 잊어버리게 되고 희락 속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희락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자를 향한 경고입니다. 희락 때문에 주님을 무시하는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두로를 희락의 성이라고 부른 이유는 희락으로 가득 차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희락에 빠져서 희락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희락이 인생의 전부이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고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마지막을 외치는 선지자의 음성에도 귀를 막고 외면해 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희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학교를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일반대학을 가는 것은 사람의 뜻이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리심을 담아두고 살아갈 때 그 신자는 세상을 편안하게 살든 즐거움을 누리며 살든, 아니면 고생을 하며 살든 상관없이 언제나 그 중심은 그리스도일 것이고 그렇다면 희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알 것이고, 고통 속에서도 은혜를 알 것입니다. 때문에 주님을 마음에 두고 사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비록 남들보다 가진 것이 없이 고생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불평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신자에게는 신앙적인 삶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로 같이 희락을 누리는 것은 신앙적인 삶이 아니다라고 해버리며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금욕을 주장하는 분이 되버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사가 성경연구하고 설교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가지고 신앙적인 삶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앙적인 삶을 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종교적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신앙적인 삶이라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들은 하나님이 목사에게 맡기신 일이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맡겨진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것이 신앙적인 삶이거나 거룩한 삶이기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도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진 그 일이 하나님이 맡기신 일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꼭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해야 신앙적인 사람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십자가의 정신이 흐르고 있을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해도 그것은 신앙생활입니다. 희락을 누리든 무엇을 하든 상관없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는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사느냐'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세상의 희락이 너무 좋아서 마지막을 외치는 음성을 듣기를 싫어하거나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따로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가슴속에 십자가의 피가 흐르고 있는가만 보십니다. 자식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식이 잘되는 것을 주님의 십자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약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귀하게 여기는 신자가 자식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자식의 출세가 쓸데없는 문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자식의 출세에 연연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의 것에 욕심을 가지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겠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 욕심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그순간 주님이 나에게서 무시당하고 외면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욕심을 가졌다고 해서 잘못이 아니라 욕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외면해 버린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주님을 마음에 두고 사십시오. 지금 세상은 주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할만큼 좋은 것이 많고 편안한 세상입니다. 편안하게 살고 희락을 누리며 살든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잊어버리지 않게 해달라며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