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자 (사 28:1-10)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 영화의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따서 먹으리로다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지혜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금의 수입에 만족하며 사십니까? 아마 만족하시는 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돈에 목말라하는 심정으로 사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돈에 부족을 느낍니까? 그것은 돈이 있어야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소위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의 욕구는 그만큼 더 확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명과 문화들을 누리고 싶고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문명은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사람은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 편안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문명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도 같이 확장되기 때문에 결국 문명을 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게 되고 그만큼 돈에 더욱 목말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돈이 필요하다면 그 쓰임새를 살펴보십시오. 거의 모두가 문명을 누리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사실 하루 세끼 먹는 양식을 위해서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습니다. 모두가 주어진 문명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돈입니다. 그렇다고 문명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을 버리고 문명을 누리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을 떠난다고 해서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이 없는 밀림에서 사는 사람들도 밀림의 나름대로 욕심이 존재합니다. 단지 문명이 없어서 문명에 대한 욕심이 없을 뿐이지 그들에게도 문명이 주어지면 오늘날의 문명 사회와 똑같은 욕망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돈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문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되고 그것이 남들은 다 하는 것을 나혼자 하지 못한다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존심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왜 나에게는 다른 사람같이 세상의 복을 주시지 않습니까?'라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서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지혜로운 삶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에 빠지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리되 자신에게 주어진 것 안에서 누리라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면 되는데, 없으면서도 자꾸 옆사람을 돌아보면서 자신도 가지고 싶어하고 누리고 싶어하다 보니까 더 속상해지고, 자신이 한심스럽고, 남편이 미워지고, 하나님께 원망이 되고 그러다 보니까 자신의 욕심을 앞세운 기도밖에 할 것이 없는 신자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요소와 조건들이 모두 세상 안에 갖추어져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만 소유하면 기쁨과 행복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것만 있으면 행복 할텐데'라는 생각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불행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한데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사야를 살펴보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한마디로 세상을 '망하는 장소' 이 외에는 전혀 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가득차고 화려하고 기름진 것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이라고 해도 이사야에게는 '점차 소멸되어 가는 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같으니 화있을진저"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란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를 말합니다. 당시 수도인 사마리아는 북쪽 이스라엘의 부요함과 번영의 상징이었는데 그러한 사마리아도 이사야의 눈에는 단지 쇠잔해 가는 꽃으로만 보여졌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강하고 힘있는 나라인 앗수르를 들어서 에브라임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에브라임의 마지막을 알고 있는 이사야의 눈에는 자신들의 부요함과 번영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마리아가 점차 쇠잔해 가는 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을 아는 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아는 바른 선지자들은 모두 세상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선지자들은 세상의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서 잘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자신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안겨주는 곳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행복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람들이 돈, 돈, 돈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미친 자의 모습입니다.

당시 에브라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세상의 부와 번영에 취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는 '취한 자'로 표현합니다. 세상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들이 꼭 술에 취한 사람 같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상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3절에도 보면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7절에는 북쪽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다까지 독주와 포도주에 취한 자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바라보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술취한 사람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엉망인 것 같이 지금 에브라임이나 유다가 그와 같이 엉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술을 마시고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술에 취한 자처럼 정상이 아니고 엉망이다는 것이다. 마지막을 바라보고 있는 선지자로서는 눈앞에 멸망이 닥쳐왔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부요함과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들이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것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사야의 시각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비춰 보십시다. 세상을 번영과 부요함이 가득찬 곳으로 바라보지 말고 코앞에 심판이 닥쳐온 곳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 세상도 이사야 선지자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이 취한 자입니다. 도대체 어디 하나 정상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종교인은 종교인대로 모든 사람들이 술에 취한 자처럼 살아갑니다. 행동도 엉망이고 말하는 것도 엉망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돈입니다. 돈이 최고이고 돈을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술에 취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세상이 정상적으로 보여지십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세상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돈에 미치고, 권력에 미치고, 출세에 미치고, 성공에 미쳐 살아가는 온통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가득차 있는 취한 자들의 세상으로 보십니다. 노아 시대와 같은 세상이고, 소돔과 고모라와 똑같은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소위 하나님을 안다는 신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세상이지만 신자들만큼은 정상적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데 이사야 선지자 당시 신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7절에 보면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당시 유다 사람들과 제사장 선지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과 목사들의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모두 같이 취했습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취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면 취한 자를 나무라기도 하고 잘못 가는 길을 바로 잡아주기도 할 것인데 모두 같이 취했으니 결국 다같이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줄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같이 취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이상을 바르게 풀리가 없습니다. 세상을 이사야같이 심판의 자리에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이상을 자기 멋대로 풀면서 말도 아닌 말을 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러한 제사장 선지자들을 독주와 포도주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옆걸음치고 있는 모습으로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지도 않는 말을 하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술취한 자가 횡설수설하는 것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목사들과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취해 살아가면 그것을 경고하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할 목사들이 자기들도 같이 세상에 취해 있으니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을 하고 계시도 아닌 것을 계시라고 하면서 말도 아닌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술취한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위엣 것을 바라고 살아라고 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교만으로 이끌어 가는 말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술취한 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말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서도 그 믿음을 자신을 죽이는 믿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살리기 위한 믿음으로 말하고 있으니 그 믿음이 어떻게 사람을 살리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말도 아닌 말을 하고 횡설수설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 서서 심판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세상에 취해 있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됩니다. 같이 앉아서 대화를 한다 해도 한쪽은 천국만 이야기하는데 한쪽은 교회 부흥을 이야기하고, 일년 재정이나 따지고, 교회 키우는 방법 등 성경에도 없는 말도 아닌 말을 하는데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이러한 말도 아닌 말에 속아넘어가는 것도 같이 취해있기 때문입니다. 같이 비정상이기 때문에 비정상의 말을 정상적인 말로 듣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마지막은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과연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앉아서 대화를 하면 대화가 통할 수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마지막때 살아남을 자는 누구입니까? 5절에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이란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 취한 자들을 모두 치시는 날입니다. 그 날에 남은 백성이 있는데 이들은 겸손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는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볼 줄 알았던 겸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손수 주시는 영화로운 면류관, 아름다운 화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마지막때 남은 백성, 겸손한 백성들의 면류관 화관이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자들이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면류관을 쓰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세상의 면류관에 비할 바 없는 하나님이란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면류관의 소중함을 안다면 과연 세상에 취하고 돈에 취해서 살아가겠습니까?

여러분, 취해서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지금 세상 구석구석은 멸망의 요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해지고 힘을 가진 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마지막때 하나님이 면류관 되어주시는 겸손한 사람, 남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 살아가십시오. 술취한 세상에서 취하지 않은 자로 산다는 것은 무척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시고 분명히 갚아주십니다. 그때까지 참으면서 같이 세상에 취하지 말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