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산 (사 29:1-8)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 내가 너를 사면으로 둘러 진을 치며 군대로 너를 에우며 대를 쌓아 너를 치리니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이리라 그럴지라도 네 대적의 무리는 세미한 티끌 같겠고 강포한 자의 무리는 불려가는 겨 같으리니 그 일이 경각간에 갑자기 이룰 것 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지진과 큰소리와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같이,밤의 환상 같이 되리니 주린 자가 꿈에 먹었을지라도 깨면 그 속은 여전히 비고 목마른 자가 꿈에 마셨을지라도 깨면 곤비하며 그 속에 갈증이 있는 것 같이 시온산을 치는 열방의 무리가 그와 같으리라"

목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바르게 가르침으로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두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목사라는 존재가 오히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 스스로가 목사에 대한 인식을 잘못 가짐으로서 가져오는 결과일 수도 있고, 또 목사 스스로 목사의 존재성을 자기 탐욕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서 활용할 때 나타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목사가 신자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방해하고 있는 모습들이 너무 많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 방향이 너무 뚜렷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서 '겸손'이라고 말합니다. 겸손은 '나는 주님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태도를 말합니다. 물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세상의 것이 있든 없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향을 받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무엇의 영향을 받습니까? 이것을 알려면 여러분을 울게 하고 웃게 하고, 슬프게 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면 됩니다. 돈이 울게 하고 웃게 했다면 여러분은 돈의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 자식 때문에 기쁘고 슬펐다면 주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남편과 자식 때문에 산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교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겸손은 돈 때문에 울음이 나오다가도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웃을 수 있게 합니다. 남편과 자식 때문에 슬프다가도 주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게 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신자들을 이러한 겸손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신자들이 겸손으로 나아가는데 목사가 걸림돌이 될 수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목사가 신자를 오히려 교만으로 인도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난처하고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것은 목사의 행동이 자칫 잘못하면 신자를 교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신자들은 목사의 행동을 기준으로 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목사가 하는 것은 무조건 옳은 행동인줄 알고 무턱대고 그대로 따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드려서 저는 여러분들의 세상적인 복을 위해서는 기도를 전혀 안하는 입장입니다. 이사한 가정에 가서나 개업하신 곳을 방문해도 복을 위한 기도는 전혀 안한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목사가 세상적인 복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입장에서는 단지 성경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복을 위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 교회를 갓나온 신자라면 얼마든지 인간적인 생각에서 어떤 문제해결을 위해서나 복을 위해서 목사에게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목사가 '그것은 성경이 아니오'하면서 거절해버리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저는 얼마든지 기도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자연히 복의 진짜 의미를 발견하고 세상의 복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될 때를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물론 교회를 오랫동안 나오신 분이 그런 부탁을 한다면 그것은 좀 문제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체를 가지고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는 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 전부인줄로 알고 복에 매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만일 목사가 이러한 마음으로 초보적인 신앙에 있는 성도가 부탁한대로 그러한 기도를 했을 때 만약 그 자리에 다른 신자들이 있었다면 그분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겠습니까? 목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분들이 '아 복을 위해서 기도해도 되는구나'하면서 마음놓고 복에 매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목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만약 목사가 어떤 문제를 위해서 기도해 줬을 때 그 기도대로 문제가 해결되어 버렸다면 그분은 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바라보고 목사의 기도의 힘을 의지하게 될 위험이 농후합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는 본의 아니게 신자를 교만으로 인도해 버리게 됩니다. 목사의 기도가 신자로 하여금 '목사의 기도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에 빠지게 만들고 그것이 결국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목사를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실상은 목사를 중심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저의 관심은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을 교만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일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삼가하고 싶은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행동 하나하나에 여러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들이 교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그토록 염려하느냐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이 그 내용입니다. 1절에 보면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리엘이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이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 괴로움은 하나님이 주신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괴로움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애곡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괴롭게 하신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징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징계를 받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네가 낮아져서 땅에서 말하며 네 말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 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징계하신 이유는 그들을 낮아지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그들이 교만했는데 징계를 해서라도 낮추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기뻐하셨다면 지금도 겸손한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때에 교만한 자를 징계해서라도 낮추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지금도 마찬가지로 교만한 자는 낮추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징계하셔서라도 낮추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교만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기초 돌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28: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기초 돌을 두셨습니다. 기초 돌이란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 돌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하시고 징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돌의 의미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은 징계를 받지 않고 이 돌의 의미를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은 징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기초 돌은 세상이 망해도 영원히 남는 돌입니다. 그러한 기초 돌을 남겨 놓으신 것은 너희가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이 기초 돌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기초 돌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세상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교만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자는 징계를 해서라도 낮추시고 기초 돌을 바라보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기초 돌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날 교회의 기준이요 가정의 기준이요 우리 자신의 기준이 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해도 기초 돌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해야 하고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야 할 운명인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자꾸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니까 징계를 해서라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신자들은 징계를 싫어하고, 징계가 있으면 낙심해 버리고 한숨만 쉬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히 12:8절에 보면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아들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5-13절까지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도성이 교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왜 징계를 해서라도 낮추시려고 합니까?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같이 신자들이 징계를 받는 이유는 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니라 세상을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징계하십니다. 징계를 받을 때 우리는 괴로움과 고통 때문에 슬퍼하며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 12:11에서는 징계 받는 당시에는 즐겁지가 않고 슬픔뿐이지만 후에 그 징계로 연단을 받는 자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가득찬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징계하시고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결국 징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아들로 인정하시고 아들로 대우하신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우린 너무 자주 하나님의 사랑을 잊은 채 살아가는 족속입니다.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인데 그것을 내 힘으로 착각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은 은혜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징계를 하셔서라도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초 돌을 두신 시온산, 즉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징계는 백성을 향한 징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아닌 자를 향한 징계도 있습니다. 그것이 5-8절까지의 이야기입니다. 6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벽력과 지진과 큰 소리와 회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것인즉 아리엘을 치는 열방의 무리 곧 아리엘과 그 보장을 쳐서 곤고케 하는 모든 자는 꿈같이 밤의 환상같이 되리니"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을 친 이방인을 징계하십니다. 그런데 이들을 징계하시는 것은 예루살렘을 고치시고자 하는 의도와는 달리 단지 심판을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징계를 받았다고 할 때 이 징계가 나를 고치시려는 징계인지 아니면 심판을 위한 징계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징계 후의 태도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고치시고자 징계하셨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징계를 받음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닌 자는 징계를 받으면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만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이 아닌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이 신자를 징계하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징계로 인해서 내가 아들임이 더욱 확인되고 주를 바라보고 은혜를 깨닫는 겸손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징계를 부끄러워합니다. 징계 받는 것을 자신의 자존심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신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면 그것을 비웃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런 일을 당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분명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우린 오직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실 일은 어떤 징계를 받았을 때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징계하심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하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떳떳함이 있어야 합니다. 징계 받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제가 교만으로 나아갈 때 징계해서라도 아들답게 고쳐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참된 아들다운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기초 돌, 그리스도가 놓여 있는 시온산으로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