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과 마음 (사 29::9-14)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하면 대답하기를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인간은 본성적으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둔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목표는 포기한 채 하나님이 인도하신 대로 군소리 없이 따라가야 하고, 인생도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뜻하는데 누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겠습니까?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생의 모든 소망과 욕망을 자기에게 두고 사는 인간이 죽으나 사나 자신은 버린 채 하나님만 위해서 살겠다고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서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자나깨나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인간이 자기의 삶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하나님을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도 싫어하는 것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경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9절)는 말씀을 보면 취하고 비틀거리는 것은 당연히 술을 먹어야 나타나는 현상인데 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취하고 비틀거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경된 것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경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소경 되게 하셨습니까?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눈은 선지자요 너희 머리를 덮으셨음이니 머리는 선견자라"(10절) 인간이 하나님을 모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잠들게 하는 신을 부어서 소경 되게 하고 머리를 덮었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머리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데 눈을 감기우고 머리를 덮으셨으니 어느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보지 못하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가겠습니까? 볼 수 없는 인간이 본다고 하고, 깨달을 수 없는 인간이 안다고 하니 결국 엉뚱한 가짜 하나님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외부의 힘에 의해서 눈이 떠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즉 여호와의 신이 우리에게 임할 때 일어나는 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신자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때 설득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설득이란 인간의 말재주를 가지고 상대방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눈을 뜨게 할 때 가능한 일인데, 과연 인간의 말재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말재주로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부지런히 말하는 법을 배우고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눈이 떠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쉬운 문제입니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는 소경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보고 있는 신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어떤 분은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하면 잘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을 믿는 문제는 유식하고 무식하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소경 되게 하셨으면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전도 기술을 가지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겠다고 설쳐댈 수 있습니까? 결국 그 역시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서 본다고 하는 소경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또 무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되 나는 무식하다 할 것이니라"(11절)는 말씀대로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알 수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모든 자에게 봉해져 있는 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와 같이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봉한 책으로 남겨 놓으셨고, 하나님 자신도 감추셨습니까? 그것은 세상 그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 없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성경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면 택한 자의 의미가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길을 철저히 막아 놓으시고 죄에 대하여 무서우신 하나님을 보이십니다. 무서우신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소경된 자들이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찾아가는 하나님은 오직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천국 보내시려고 애를 쓰시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 인간들이 죄에 대해서 담대해졌습니다. 죄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이것이 바로 소경된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용서가 없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죄에 대하여 철저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눈이 뜨인 자는 무엇을 보겠습니까? 내 옆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 있는데 자신은 죄 용서받았다고, 천국가게 되었다고 춤을 추면서 기뻐하겠습니까? 눈이 뜨인 자는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철저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무서우신 하나님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달려야 할 자리에 대신 달려 있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죄에 대하여 애통하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가집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오면 주님께 자신의 몸을 던져 헌신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눈이 뜨인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을 말할 때 어떤 하나님을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무서우심과 심판을 그대로 선포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보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가 당시 소경된 자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들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인데 외부에서 주어진 은혜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은혜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은혜 외에 다른 것을 앞세워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러나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는 무척 많이 말하면서 은혜 앞에 다른 것을 앞세웁니다. 은혜란 인간의 모든 기술과 재능, 인품과 덕목들을 부인하는 말입니다. 신앙을 훌륭한 인격과 덕목으로 연결 지어서 좋은 인품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 앞에 인간의 인품, 덕목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13절)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말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으면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척하는데 정작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자기가 중심이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을 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라고 합니다.

사람의 계명은 은혜 앞에 인간의 노력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인간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있는 자입니다. 죽어있는 자가 거듭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외부의 힘, 즉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죽어있는 인간이 '깨어나라'한다고 해서 스스로 깨어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교회서는 '거듭나는 비결'이라 해서 인간의 방법을 가르칩니다. 인간 스스로 움직여서 깨어나자는 것입니다. 소경된 사람이 성경을 본다해도 하늘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죽어 있는 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거듭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뭘 해라고 하는 것은 은혜를 부인하는 사람의 계명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계명으로 인해서 입술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 혹 '신 목사 당신은 무엇을 근거로 남들의 말을 사람의 계명이라고 몰아세울 수 있는가? 그것은 당신의 편협이고 독선 아닌가?'라고 공격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모든 목사들은 자기의 말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하지 '사람의 계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14절) 이 말씀을 보면 당시 이사야의 말이 하나님의 계명이고 거짓 선지자의 말이 사람의 계명이라는 것이 드러날 때는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셨을 때라고 말합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이 사람의 계명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행하셨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기이한 일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메시야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경된 자들이 상상하는 메시야는 자기들을 해방시키고 지상 낙원을 이룩해줄 힘있는 용사 같은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전혀 힘이 없고 비천하고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 전혀 일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계명이란 예수님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계명은 필연코 예수님의 생각과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것을 가지고 오셨는데 인간은 눈에 보이는 땅의 것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충돌이 발생합니다.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윤리 도덕을 통해 신자되고 예수님 만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자로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윤리 도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헌금하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자 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좋아서 헌금하고 예배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앞세울 때 은혜는 가려지고 맙니다.

교회가 종교생할의 법칙을 만들어 가지고 교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신앙이 있는 척 위장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열심히 종교생활에 빠져있다보니 자신이 신앙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이며 죽어 있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에 대하여 눈이 뜨인 자가 되었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소경에서 벗어난 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만 하시면 안됩니다. 실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삶으로 나가야 합니다. 입술은 여호와를 경외하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입술과 마음이 멀어져 있는 사람은 사람의 계명으로 나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하나님을 부르실 때마다 아무 생각없이 입술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하나님을 두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