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장이 (사 29:15-24)

"화 있을진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미구에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삼림으로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경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그들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케 하느니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께서 야곱 족속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야곱이 이제부터는 부끄러워 아니하겠고 그 얼굴이 이제부터는 실색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 자손은 나의 손으로 그 가운데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자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교회에서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있는 쓸모 있는 존재임을 부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실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내가 잘못되면 결국 하나님이 손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교만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실 때 인간은 없습니다. 오직 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필요하고 가치가 있어서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가치한 존재임을 발견하라고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가치있는 인간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가치한 우리를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인 가인을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이 가인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가인의 죄를 보여주기 위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에게서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너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았느냐?'를 보실 뿐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자 합니다. 나는 남에게 욕을 먹으면 안되고 칭찬만 들어야 하고, 남에게 뒤떨어지면 안되고 항상 앞서야 하고, 못나 보여서는 안되고 잘나 보여야 한다는 것이 자신에게 가치를 두고 사는 인간입니다. 결국 이런 인간이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가 높아져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은혜는 소유가 증가하고 자신의 위치가 높아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무가치함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저는 가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말로 고백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안다는 것은 '나는 하루 세끼 밥먹고 살 자격도 없고, 좋은 옷 입고 편안하게 살 자격도 없는 인간입니다'는 것을 진심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만약 신자가 자신의 무가치함을 안다면 필히 현재 자신의 삶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루 세끼 밥 먹고 살 자격도 없는 내가 밥을 먹고 있으니 무엇을 먹어도 하루 세끼 밥먹는 것으로 감사하고, 옷입을 자격도 없는 내가 옷을 입고 살아가니까 좋은 옷이 아니라도 감사하고,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없는 내가 편안하게 사니까 그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인데 하나님께 무엇을 더 요구하겠습니까? 지금 있는 것도 무가치한 나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안다면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할 필요도 없고 요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직 무가치한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일만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처음에는 은혜로 구원받지만 구원을 얻은 뒤에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선한 행위에 힘을 쓰며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은혜의 본질을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플 때 놔주는 일회용 주사가 아닙니다. 은혜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나를 덮어 누르고 있는 거대한 지붕과 같은 것입니다. 즉 죽을 때까지 은혜의 지배아래서 살아가는 사람이 곧 구원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지만 다음부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것은 은혜의 본질인 인간의 무가치함을 벗어나서 '인간은 그래도 쓸모 있다'는 교만의 자리로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사야가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목격했을 때 처음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더러움을 직시했습니다. 쓸모 없고 무가치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죄인된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다'는 외침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망해야 하고 죽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이사야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서 망해야 하고 죽어야 할 자신의 무가치함을 발견했다면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젠 죽었다'하면서 자신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왔다고 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성경을 몇 번 통독했고, 십일조를 잘하고, 기도를 몇 시간하고, 봉사를 잘한다는 등의 말이 나오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고,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더 이상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십자가만 알고자 하는 열망이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실수는 관심을 엉뚱한 데 두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열망이 주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기 때문에 은혜로 산다고 하면서 세상 일로 속상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일로 속상해 하는 것은 결국 주님보다도 세상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더러움과 무가치함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15,16절은 로마서 9장에 나오는 토기장이 이야기와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토기장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이면서도 사실 살아가면서 그 말씀에는 전혀 비중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화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화있을진저라는 말은 '너희는 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그렇다는 것입니까? 뒤에 보니까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라고 말합니다.

화있을 자의 모습은 자기의 도모, 즉 자기의 계획과 자기의 뜻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를 위해서 자기의 계획을 세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화있을 행동, 즉 저주받을 행동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계획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쓰시느냐는 전혀 무시해 버린 채 오직 자신을 위한 자기의 계획에만 관심을 두고 살다가, 잘 안되면 잘 안된다고 투덜대는 것이 바로 죄가운데 있는 저주받을 인간의 모습이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여기에서 기이한 일이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일을 가리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에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없는 지혜는 지혜가 아니고 총명도 총명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만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고 총명이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지혜는 눈앞의 현실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장차 주어질 영광된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당장 눈앞의 돈 몇 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 중요하게 앞세우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눈앞의 돈을 따라가고 현실에 더 치우쳐서 살아가다 보니까 결국 장차 주어지는 영원한 영광된 나라보다는 지금 당장 먹고 살아가는 문제를 앞세워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사는 신자의 참된 지혜를 토기장이 이야기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께 '나를 이렇게 만들어 주세요'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을 진흙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어떤 모양, 어떤 용도로 만들었든지 진흙이 거기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말할 수 없듯이 우린 단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님을 섬길 뿐이지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세상을 악하게 본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세상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이사야가 본 악한 모습이 없는지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라는 말에 절대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피조물이 피조물답게 살아왔는지 지금까지 우리 삶의 하나하나를 더듬어 봐야 합니다. 그리고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섬기고 경배하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거기에서만 은혜가 존재하고 십자가가 존재하고 죄인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조물이면서도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나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되는 인간의 무능력을 고백하면서 주님께 '주님, 진흙인 제가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항상 내가 주인 되어서 살아갑니다'하면서 주님의 도우심만 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지혜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17-2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에게 하실 일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며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24절에 "마음이 혼미하던 자도 총명하게 되며 원망하던 자도 교훈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총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세상을 살아가는 삶이 힘들고 지치고 속상할 때 '나는 진흙이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다'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시고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는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진흙의 삶의 비밀을 잘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깨달은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우리의 부족을 알고 우리의 죄를 알고 진흙의 삶을 살아가는 참된 신자되는 것을 여러분의 열망과 소원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흙입니다. 진흙으로서 자신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로 순종하시면서 주어진 위치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기에 힘쓰십시오. 진흙이 진흙의 가치를 뛰어넘고 진흙의 위치를 벗어났을 때 주어지는 것은 불만과 불평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화있을진저'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 우리는 진흙임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