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 (사 2:12-2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 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신자가 복음을 깨닫고,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복음을 호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호응하지 않는 것을 주장하고 산다는 것은 자연히 타인과의 갈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으로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소수의 사람이 주장하기란 참으로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부딪히지 않는 복음으로 바꾸어서 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곧 양보이고 타협이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복음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을 절대로 반대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에는 자신을 위한 포기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모든 유대인들의 반대도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복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으시다면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복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고집이 아닙니다. 신자가 복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진리라는 차원에서입니다. 여러분이 깨달은 말씀이 하나님 편에서 진리의 말씀이라면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떤 반대와 어려움이 있어서 포기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곧 복음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를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복음이 아닌 모든 것이 어떻게 되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마지막 때를 모른다면 말씀으로 사는 삶에 조그마한 어려움만 있어도 '좋은게 좋은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생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좀 더 쉬운 길을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마지막 때에 살아남을 자와 멸망 받을 자가 누구인가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신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신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이것 하나 때문에 믿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런 저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하나님을 믿는 모습만 보여주며 살면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고 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해하는 성도가 되었다면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께 붙들린 자입니다. 이제 우리 개인의 삶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어야 할 도구로 부름 받은 삶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날, 그런 삶을 산 주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신자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세상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을 어떻게 하실 것이고 누가 마지막 때에 살아남는 자가 되는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로서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를 아는 자로서 이스라엘을 볼 때 그들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계획과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그 모든 계획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 계획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계획을 아는 자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삶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계획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심판을 아는 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소리에도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자의 삶입니다. 미래를 아는 자로서 세상을 사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하게 하신 목적이고 성경을 남겨두신 목적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마지막 때에 살아남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땅을 의지하지 않고 마지막 때를 바라보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마지막 때 세상의 모든 산은 낮아지지만 하나님의 전이 있는 여호와의 산은 높아진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 산에서는 율법과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산은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있는 그 자리가 곧 여호와의 산입니다. 마지막 때는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낮아지고 높아지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이 낮은 것으로 보여지는 것, 이것이 여호와의 산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이렇게 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세상이 좋아하는 돈도 낮은 자리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여지고, 지위도, 자식이 잘되는 것도, 남편이 승진하고 잘되는 것도 모든 것이 낮은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나 자신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내 안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귀하게 여김 받는 것이지 나는 실제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자가 자기를 중심으로 살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무슨 일을 당해도 괜찮다. 다만 나 때문에 복음이 왜곡되어진다면 안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나는 망해도 주님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도 요한의 마음이 아닙니까? 이런 삶을 누가 감히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사도 바울같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께 미친 자가 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말합니다. 5-9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실패의 모습이 나옵니다. 동방풍속이 가득하고, 이방인으로 손을 잡아 언약하고 ,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마필 병거가 가득하고, 우상도 가득하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고, 모든 사람이 거기 절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스라엘의 실패는 곧 오늘 우리들의 실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더 믿음이 갔던 것입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그것도 현재보다는 미래에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그 나라를 보이는 것처럼 살지 못하는 자는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 자와 거만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데 그 날에는 세상에서 높다고 자처하고, 위대하다고, 귀하다고 자처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귀하게 여기고 아름답게 여겼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립니다. 웅장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여겼던 예배당도 무너집니다. 귀한 직분이라고 말하는 목사, 장로도 다 낮아지고 어두운 곳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19절에 나옵니다. 20절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진다는 것도 땅속에 사는 두더지와 같이, 어두운 동굴에 사는 박쥐와 같이 땅속으로 어두운 곳으로 쫓겨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장차 마지막 때 낮아지고, 땅 속 어두운 곳으로 쫓겨가고 도망칠 것을 의지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인생을 마칠 때까지 오직 하나님만 가장 귀한 분으로 알고 살아야 할 운명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적당히 세상 것을 취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고 안해주고와 상관없이 나를 사망에서 건지시고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신 것, 그것만 안다면 하나님이 가장 귀한 분으로 나의 삶에 자리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적당히 세상 것도 취하면서 살고자 하겠습니까?

22절에 보면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있느뇨"라고 합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의 날에는 다 낮아지고 무너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인간까지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에 매이게 되면 결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가게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가를 보십니다. 여러분 무엇을 의지합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마지막 때 사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