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있는 자 (사 30:15-22)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 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사람들은 근심 걱정 없는 모든 행복의 근원을 세상에 두고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들의 인생을 더듬어 보면 불안과 초조 염려와 걱정의 근원들이 모두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근원을 두고 있는 불안과 염려를 세상의 것을 소유함으로서 해결해 보겠다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라는 것은 세상의 것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확장되는 것이 인간의 불안과 염려입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자신에게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잃어버릴 것을 염려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인생입니다. 소유할수록 더욱 확장되는 것이 인간의 불안이요 염려이기 때문에 결국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소유로부터 벗어나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소유함으로서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은 결국 더욱 더 깊은 인생의 어둠으로 빠져들어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인간은 자신을 괴롭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염려에 빠지게 하고 압박하고 허망하게 하는 것을 오히려 신뢰하는 어리석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며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패역한 백성의 모습입니다. 12절에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뢰하니"라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리켜서 압박과 허망을 의뢰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오히려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것으로, 허망한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애굽에 의해서 오히려 압박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훼파하실 때 그들을 전혀 도울 수 없는 허망한 것을 의뢰하고 있는 어리석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사람들은 돈, 출세라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오히려 인생은 그것들로 인해서 압박을 받을 것이고, 나중에는 허망한 것에 불과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나보다 잘나고 돈많고 힘있는 사람 앞에서는 머리 숙이면서 나보다 약한 자에게는 큰소리치면서 살아온 삶들이 세상 것을 의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불안과 초조함과 염려 속에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것 역시 세상 것을 의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15절에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함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아니하고" 이 말씀에서 안연히 처한다는 것은 불안과 염려를 더 떨쳐버리고 평안가운데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어떤 일이 있어도 불안해하거나 염려하지 말고 평안에 처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잠잠하게 하나님만 신뢰하고 살아가면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힘있고 빠른 말을 의지해서 도망하고자 하니까 결국 17절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7절"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가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즉 15-17절까지의 말씀을 요약하면 신자가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평소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고 했으면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된 하나님을 신뢰하고 조용히 있으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인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세상 힘을 의지해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게 되고, 세상의 힘의 그늘로 피하다보니까 힘있는 자가 큰소리만 쳐서 그 앞에서 벌벌 떨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돈있고 권력 있고 힘있는 자에게 꼼짝 못하고 그들이 한마디만 해도 두려워하게 됩니까? 그 이유는 내 자신이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연히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자신이 해야할 일에만 충실히 하면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산다면 모든 일에 당당할 수 있는데 직장을 의지하다보니까 사장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직장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사장이라는 돈을 가진 자에게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 담임 선생님 앞에서 괜히 머리 숙이게 되는 이유도 선생에게 잘보여야 내 아이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촌지를 주면서 선생님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지 못하고 세상의 힘을 통해서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다 보니까 결국 강한 힘에 굴복하게 되고, 힘있는 한사람이 꾸짖으니 천사람이 도망하고 다섯이 꾸짖으니 다 도망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살게 해달라고 하면서 정작 그 마음속에는 세상을 포기하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의지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는 것 때문에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신자다'라고 착각하면서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사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힘에 대해서 탐욕을 가지고 살아가는 증거는 우리의 마음속에 불안과 초조와 염려와 걱정이 발생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불안 초조 염려 걱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있을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심적 갈등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분명히 이런 반감을 하실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인간이 불안 초조 염려를 다 떨쳐 버리고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하는 말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염려 걱정을 다 물리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당장 그런 말하는 목사 자신부터 교인이 줄어들고 재정이 줄어들면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염려하게 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이야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죄인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평안한 삶을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인간의 삶의 실태를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인간은 불안과 초조와 염려를 버릴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주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신명기 28장으로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28장은 축복 장이 아니라 저주장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무엇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입니다. 신 28:1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누리시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약속대로 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어느 인간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지키지 못할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저주입니다. 15절에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않으면 모든 저주가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65절을 보면 "그 열국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을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오직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의 마음으로 떨고 눈으로 쇠잔하고 정신으로 산란케 하시리니" 이 말씀대로 평안을 얻지 못하고 쉴곳을 얻지 못하고 마음이 떨리고 정신이 산란한 상태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또 67절에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의 보는 것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는 말씀은 무슨 일이 생기면 두려움부터 생기고 오늘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것들이 모두 저주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때문에 불안 초조 염려라는 것은 우리들이 물리치겠다고 해서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이 18절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러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이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바로 저주 가운데서 불안함과 초조함과 염려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희망의 말씀입니다.

신자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단 아무것에나 소망을 두면 안되고 오직 하나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에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으신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8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와 긍휼입니다. 저주가운에 있는 우리를 저주속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고 긍휼이 아니면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이것을 깨닫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자 하나님께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긍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신자야말로 '복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의 자세는 언제 겸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불쌍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신자가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순순히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을 환난과 징계라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힘들게 하시는 이유도 18절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은혜와 긍휼만을 구하는 참된 이스라엘 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징계하시면서 어려움으로 빠지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인생이 부요와 풍족함으로 나아갔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습을 아무리 봐도 불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은 소경, 절름발이, 문둥병자 같은 세상으로부터 천대받고 무시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의 천대와 무시 때문에 주님께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이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는 나라입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자신의 부족과 죄인 됨을 알고 주님께 나와서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새이스라엘이며 교회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새이스라엘 되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와 긍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으시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자리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스승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20,21절에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니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에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라고 말씀한대로 스승으로서의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는 방법으로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감싸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환난과 고생으로 가르칩니다. 그리고 신자가 항상 정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뒤에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기도할 때는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해놓고는 말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버립니다.

우리는 저주 가운데 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 모든 말씀에 복종하신 예수님 덕분에 은혜 안에서 삽니다. 예수님이 말씀대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세상적인 시각 말고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때 가장 뛰어난 자가 누구인지 마음에 새겨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평안치 못하고 불안과 염려에 빠져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마시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그것이 복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높아지기보다는 차라리 천하에 재수 없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시오. 그것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살 때 비로소 모든 일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있는 자가 나아가야 할 정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