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 (사 33:1-6)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 진동 시키시는 소리로 인하여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시므로 인하여 열방이 흩어졌나이다 황충의 모임 같이 사람이 너희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의 뛰어 오름같이 그들이 그 위로 뛰어 오르리라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 데 거하심이요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

신자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의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들의 관심이 있습니다. 신앙상의 문제는 이 두 관심이 서로 대립될 때 발생합니다. 관심이 서로 다를 때 신자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심의 일치는 하나님의 관심 앞에 우리의 관심을 따로 제시하고 주장하면서 서로 비교하고 수정해 가는 식의 일치가 아니라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관심에 무조건 우리의 관심이 겹쳐져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겹쳐지면서 우리의 관심은 사라지고 대신 하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어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한 삶이 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되는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버려지고 대신 그 자리에 하나님의 관심이 채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성경을 봐야할 이유도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항상 점검해야 할 부분은 '지금 나의 행동이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된 행동이냐'입니다. 그럴 때 그분은 제대로된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을 목표로 하여 사용되어 집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관심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과 일치된 삶을 살지 못할 때 그 힘은 나 자신을 위하는 방향으로만 집중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축적되어진 힘을 반드시 발산하게 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을 때 그것을 과시하고 싶고 그 힘으로 약한 자를 누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보면 우쭐거리고 싶고, 누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는 힘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학대받는 자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이 원할 것은 오직 힘입니다. 힘이 있어야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소유하고 모으려고 합니다. 힘이 없음으로 인해서 굴복 당하고 눌림 받고 학대받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고 반대로 약한 자들을 학대하는 것은 쾌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모든 소망을 종합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게 됩니다. 공통점이란 현재보다 더 나아지고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힘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힘은 곧 환경과 직결됩니다. 그 어떤 강한 힘이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 힘은 환경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사람자체에 힘이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라는 것도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권력자로 만든 것이지 대통령이라는 직책에서 물러나면 그도 곧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갑니다. 부자가 힘이 있다고 하지만 돈이 없어지고 나면 그 사람도 무시 받고 천대받는 가난한 자가 되어버립니다. 결국 환경과 인간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힘을 원하고 살아가고, 힘은 곧 환경과 직결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불만을 가지고 이런 환경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간다는 신자들에게서도 환경을 원망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야 사람들 앞에서 높아지는 것이 목적이니까 환경을 보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신자는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관심의 차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 되는 것이 관심이라면 그 사람은 결코 환경을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보시고 높여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보시고 구원하시지 환경을 보시고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신자된 자가 기억할 것은 어떤 환경에서든 나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사느냐이지 내 환경이 나쁘냐 좋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이 좋지 않아서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환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혹 신앙생활에 좋은 환경이 있다고 해도 그런 좋은 환경에서야 누가 신앙생활을 못하겠습니까? 신앙이 환경에 의해서 변화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어떤 인간이냐?'를 물으실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우리의 관심이 되어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교회 안에서도 학대하는 자와 학대받는 자, 무시하는 자와 무시 받는 자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고 합니다. 누가 화있을 자입니다. 학대하고 속이는 자입니다. 학대하고 속이는 자가 발생하는 것은 관심이 세상의 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단지 학대하고 속이는 것이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화있을진저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살지 않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라고 했습니다. 즉 이 세상이 관심이 아니라 장차 영원히 살아갈 나라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힘을 모으기에 발버둥을 치고, 주어진 힘으로 남을 학대하게 되고 속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세상 것을 주셨다면, 즉 어떤 환경을 이루어 주셨다면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라고 주신 것이지 자기의 힘으로 삼아서 약한 자를 학대하고 무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가졌든 남보다 많이 배웠든 그 모두는 하나님을 위해서 주신 것이지 우리를 세상에서 높이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만큼은 명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보지 말고 자신을 보십시오. 내가 지금 하나님의 관심으로 살고 있는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환경을 보게 되면 결국 환경을 통해서 힘을 발산하게 되고 그럴 때 여러분으로 인해서 무시 받고 고통받고 상처받는 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화있을진저'입니다.

이렇게 1절이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모습이라면 2절은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절에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가 할 수 있는 기도인데 이 기도를 보면 어느 한 곳도 자기의 힘을 내세우거나 힘을 위해서 기도하는 모습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고 하나님만 앙망합니다. 은혜만 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은 한마디로 힘이 없는 자입니다. 연약한 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여부에 상관없이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이것은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결과입니다. 환경을 볼 때는 환경 안에 뭔가 믿음직한 것이 자리하기 때문에 은혜를 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앙망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필요성도 아예 느끼지를 않습니다.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라고 말씀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연약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연약한 자에게서 어떻게 학대가 나오고 속이는 것이 나오고 무시하는 것이 나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신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그러한 모습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환경을 보지 않고 나 자신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도우심이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자임을 진심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어진 환경에 묻혀서 힘을 내세우고 과시하고 자랑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힘을 과시하는 것은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발산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의도적으로 힘을 누르려고 애쓰는 노력이 아니라 관심이 하나님 나라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힘의 원칙에서 점차 멀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원하십니다. 천국은 힘있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라 힘없는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 하심을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5,6절에 "여호와께서는 지존하시니 이는 높은데 거하심이요 공평과 의로 시온에 충만케 하심이라 너희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시온이 공평과 의로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평안함이 있고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하기를 위해서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관심이라면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의 관심과 같아야 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가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6절 마지막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너의 보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과 전혀 상관없이 산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보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귀한 보배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 신자는 무엇을 해도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구하고 도우심을 구해도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구하게 되고 자신의 환경을 좋게 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는 도우시고 힘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 세상에서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그의 나라와 그 의를 세상에 나타내고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도우십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하나님께 한 기도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그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해서 스데반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고 죽게 하기 위해서 성령이 충만케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은 우리를 세상에서 위대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의를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 의가 아니라 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나의 힘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이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15,16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높이시는 신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한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 보장이 되며 그 양식은 공급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높이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한마디로 세상이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관심거리가 되어서 살아가는 신자에게서만 보여질 수 있습니다.

신자는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고 의를 나타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런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힘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잊지 마시고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힘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마지막때 하나님 나라에서 높임을 받는 신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