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소 (사 33:17-24)

"너의 눈은 그 영광 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 너의 마음에는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하여 내리라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공세를 칭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네가 강포한 백성을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서 네가 알아 듣지 못하며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 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같을 것이라 대저 여호와는 우리 재판장이시오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오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 너의 돛대 줄이 풀렸었고 돛대 밑을 튼튼히 하지 못하였었고 돛을 달지 못하였느니라 때가 되면 많은 재물을 탈취하여 나누리니 저는 자도 그 재물을 취할 것이며 그 거민은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할 것이라 거기 거하는 백성이 사죄함을 받으리라"

세상은 흥망성쇠의 기준을 수와 양에 두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의 이치에서 볼 때는 맞습니다. 장사를 해도 손님이 많아야 흥하고 손님이 적으면 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손님이 적은데도 번창하는 장사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이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는 수와 양의 여부를 따져서 흥망성쇠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활동은 실패라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3년간 복음을 전하셨지만 예수님은 그럴듯한 세력하나 만들지를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마저 예수님을 뒤로하고 도망쳐버렸습니다. 이렇듯 세상 이치를 기준으로 예수님의 일을 살펴볼 때 예수님은 그야말로 무능하고 실패한 인물로밖에 보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은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전함으로서 세상이 멸망 받아야 함을 심판하시고 참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수의 사람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인해서 기뻐하십니다. 설사 세상이 다 멸망당하고 그 속에서 단 한사람만이 예수님의 참된 백성으로 남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들은 모든 기준을 세상의 이치와 같은 선에 세워 두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자본주의 법칙 위에 세워져 있고, 다수의 원칙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에서 돈이 곧 힘으로 작용하고 있고 많은 수의 사람이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부흥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옳지 않은 말로 치부해 버리고, 아무리 잘못된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 결과가 교회의 부흥과 재정의 증가로 연결되면 곧 진리로 통해버리는 실정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멀어져 있는 한국교회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는 것이 곧 부흥이고 그것이 교회의 힘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교인 수가 늘어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마음 뿌듯해하면서도 교인이 한사람 한사람 교회를 빠져나간다면 혹 교회가 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은석교인들이 매주일 한사람씩 빠져나간다면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불안해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이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옆에서 설사 풍랑이 불고 파도가 치고 금방 바다에 빠질 것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거기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다. 교인수가 줄어간다고 해도 사람 바라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은석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어서 교회가 망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영원하십니다. 은석교회는 사라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교회는 결코 사라짐이 없이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은석교회를 구원시키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볼 것은 하나님이지 은석교회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석교회는 절대로 망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거든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혹 은석교회는 바른 교회이기 때문에 망하면 안되고 부흥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이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교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선택하셨을 때 그 사람을 위대하고 잘되고 높아지는 모습으로 만들어서 쓰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서 누군가를 부르셨을 때 때로는 돌에 맞아 죽는 길로, 때로는 톱으로 켜 죽는 길로, 때로는 매맞고 망하는 길로,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길로 이끄셨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다면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어떤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요한같이 '나는 쇠하여도 주님은 흥하여야 하리라'는 마음으로, 나는 비록 쇠하고 은석교회가 망하는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의를 드러내고 주님이 흥하게 되는 길이라면 담대히 갈 수 있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병들고 망하고 넘어지고 온갖 고통과 풍랑 속에서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긴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 나는 주님의 모습만 나타내고 죽겠다고 하는 소원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길이 싫다면 우린 절대로 주님의 종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은석교회를 보지 말고 여러분 자신도 보지 말고 목사도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왕이시고 하나님의 교회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만 의지하는 신앙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말을 합니다. 본문은 장래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러한 예언을 할 때 이스라엘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앙 속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대한민국에 천만 명이 넘는 신자들이 모두 진실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수만의 교회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장차 하나님이 왕이신 영원한 나라가 등장한다는 예언을 한 것이 아니라, 천만의 신자가 다 가짜고 교회도 복음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말씀을 이용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신앙의 상태나 환경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세우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가능성을 보고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믿음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형편이나 환경을 조건 삼지 않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난하든 부하든 어렵든 어렵지 않든 전혀 상관없이 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풍랑을 만나고 고통 가운데 처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거나 멀리 했기 때문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 힘들어 할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왕이셨고, 심지어 내가 죽어간다면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의 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에게는 한가지 반발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면 고통과 어려움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당연하지 가만히 두고만 보시면서 어떻게 왕이시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시고, 죄를 지었을 때 징계하심으로 죄를 용납하지 않으신 무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죄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안하고 좋을 때 왕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징계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고, 이삭은 야곱이 자기의 축복을 가로챘을 때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싸우고도 살아난 자신을 깨닫고 진짜 축복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고, 모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일개 목동으로 전락했을 때 자기의 무능력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든 하나님이 택하셔서 쓰셨던 인물들은 모두 고통과 어려움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 갔던 것입니다.

20,21절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그 곳은 마치 노질하는 배나 큰배가 통행치 못할 넓은 하수나 강이 둘림 같을 것이라"

이사야는 지금 영광의 시온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할 때 비로소 모든 사물을 평안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번잡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쌓여 있을 때는 그 무엇에서도 평안과 안정됨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형편을 보면 이사야는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할 상황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믿음의 상태나 그들에게 닥쳐올 징계 등을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리고 걱정과 근심으로 쌓여 있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안정되고 평안하고 영영히 뽑히지 않을 시온성,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시온성,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보기 때문에 안정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여건과 형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형편을 바라보고 자기 주위를 바라보기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고 힘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가 귀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앞서 말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 둘 교회를 떠날 때 교회를 바라보면 불안하고 근심이 몰려오지만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멀리하는 복음을 나 자신은 믿게 되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수의 교인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적은 수라고 할지라도 참된 신자를 찾으십니다. 자기 백성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귀한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마 13장의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장사꾼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좋은 진주를 구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구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진주를 삽니다. 결국 하나님은 좋은 진주, 즉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소유하기 위해서 아들이신 예수님까지 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린 이 마음에 시선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시선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에 두어야지 결코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있으면 다른 사람은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나오게 됩니다. '왜 나만해야 하나'라는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는 다른 사람들은 안하는 것을 나라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남이 안하니까 나라도 더 힘써서 봉사하자는 것이 바로 왕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입니다.

시온성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전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 안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때문에 신자는 항상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신자답게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서로 경쟁하고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나 한사람 잘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힘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고 여러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성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그럴 수 없는 중에 장차 영광으로 오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본 것 같이 우리들도 비록 그럴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성전임을 기억하고, 무능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귀한 존재가 되었음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면서, 우리의 눈을 들어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그 나라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힘써 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