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신 (사 34:8-17)

"이것은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라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수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 거하여 쉬는 처소를 삼으며 부엉이가 거기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그 짝과 함께 거기 모이리라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친수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눠 주셨으니 그것들이 영영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 거하리라"

로마서 5: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경건한 자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경건치 않은 자, 즉 죄인 되고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세상의 희생의 차이점입니다.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라는 이 말씀이 곧 세상의 희생입니다.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는 것은 쉽지는 않지만 있을 수는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이러한 희생을 간혹 듣게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 불의한 자를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된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도하신 것을 통해서 확증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그리스도는 죄인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그 믿음으로 인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분명히 로마서 5:11을 보면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과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있는 신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스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예수 때문에 세상일이 잘 풀려서 기분 좋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 즐거움을 상실한 채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즐거움의 조건을 세상에 두고 있고, 또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상일이 잘 안되면 아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도 한숨과 염려로 가슴이 채워지게 되고, 자기를 돌아볼 때 자기 자신이 한심스러워 보이면 그 또한 예수님과 상관없이 낙심과 불안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 백성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심과 불안과 갈등 속에 젖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불안과 갈등으로 빠져들게 하는 원인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향해서 수없이 '자신을 보지 말고 그리스도만 바라보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것은 자신에게서 신자된 증거나 신자로서의 자격요건, 또는 성령을 받은 자로서의 모습,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 증거로서의 변화된 모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기대한 것만큼의 변화된 모습을 찾지 못할 때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낙심하고 실망하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신자됨에 대한 것까지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니까, 성령을 받지 못했으니까 변화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생각자체가 마귀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자신을 바라봄으로서 불안과 낙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임은 앞서 말씀드린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우리가 경건치 못할 때, 불의한 자일 때, 죄인일 때 죽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를 극복하고 구원으로 인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외적인 실천이 부족해서 신자됨에 대한 의심에 빠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로 인해서 신자된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자신이 신자되었는데도 뭔가 변화된 것이 보이지 않아서 실망했다고 한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당연히 누려야 할 즐거움을 상실해 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설명할 때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예로 들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지는 것입니까? 자식은 부모로 인해서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자식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이지, 부모에게 태어난 자식이 나중에 공부를 잘한다거나, 말썽을 부리지 않고 출세할 때 비로소 자식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식이 '나는 공부를 못하고 부모 속만 썩이는 것을 보니까 아마도 나는 자식이 아닌가보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은 바른 것입니까? 자식은 공부를 못하건 잘하건 상관없이 자식입니다. 만약 자식이 부모 속을 썩일 때 부모가 나무라고 매를 든다면 그것은 자식답게 되어라는 목적이지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매를 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들이 내가 뭔가를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에 '나는 하나님 백성이 아닌가 보다'라고 낙심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성경을 통해서 나름대로 '신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행동기준을 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교회에서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롬 12:9절부터 나오는 말씀에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서신에는 특히 성도들로 하여금 '∼을 하여라'는 명령의 의미의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말씀을 대하면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실천 요구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뭔가 실천하는 모습이 보여지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교만에 빠지게 되고, 실천을 하지 못하면 실망하고 낙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신자더러 '하라'는 말씀들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만약 성경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반대로 신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요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신자가 아닌 자도 하나님의 요구를 실천할 수 있다면 도대체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모든 것은 인간으로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실천할 수 있습니까?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령 받은 자가 실천한다는 것은 성령을 받아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신자되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해야 신자 되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는 말씀을 보면 '아 기도에 힘써야 신자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결국 신자되기 위해서 안나오던 새벽기도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를 못나올 때 신자답지 못하다는 자기 낙심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 일을 도와주거나 힘을 주어서 위대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성령은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라는 것은, 무엇을 실천했고,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자 할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심판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세상에서 내 한몸 잘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를 드러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인 것입니다. 성령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성령 받은 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의 생각은 성령을 받지 않은 자와는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8절에 보면 '여호와의 보수할 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복수하시는 날이라는 뜻으로서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 심판이 9절부터 등장하는데 한마디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라지고 짐승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은 황폐해질 것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명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책이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것들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입이 명하신 것들은 하나같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누구를 통해서 이루십니까? 여호와의 신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그의 신'즉 여호와의 신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결국 성령은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성령이 해야 할 일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모두 성령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신자 되어라'가 아니고 '신자 되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스스로 신자 되려고 노력하다가 스스로 절망에 빠지고 낙담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성령이 하게 하신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나는 실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 받을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인간이 실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그것은 성령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한다면 그 역시 성령이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성령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선을 사랑하는 자신을 기뻐하지 말고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으로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하고 안하고에 상관없이 성령이 함께 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결코 자신이 뭔가 실천하지 못했다고 해서 낙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세상에서 눈 돌리고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지만 그것을 누가 실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세상의 심판을 바라보고 천국을 소망 삼으면서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신자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살기 때문에 신자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신자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자되기 위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무엇을 하든 안하든 자녀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더러 실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성령을 보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했으면 자기 힘으로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주님,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는 인간 되게 하소서'라고 할 때 성령이 여러분이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자신이 하나님이 사람된 것으로 기뻐하실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심으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했나 못했나를 살피지 말고 '내가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항상 이것을 물으면서 여호와의 신을 바라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