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길 (사 35:1-10)

땅에서의 삶에는 수고와 고통과 눈물이 있지만 천국은 수고와 고통과 눈물이 없습니다. 땅과 천국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 불신자들이 여러분을 향해서 '왜 천국에는 수고와 고통과 눈물이 없느냐?'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천국이니까 없지' 이렇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땅과 천국의 모습이 서로 다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땅에는 죄가 있고 천국에는 죄가 없다는 것 때문에 서로 전혀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하며 한숨쉬고 불안해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인간이 땅에서 고통을 겪고 불안해하는 것은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죄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환경이 좋으면 착한 인간이 되고, 환경이 나쁘면 악하게 되고 문제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만약 환경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쁜 환경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똑같이 나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좋은 환경에서는 나쁜 사람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좋은 환경에서도 인간은 얼마든지 나빠질 수 있습니다. 또 비록 나쁜 환경이라 할지라도 착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물론 환경이 영향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환경에서도 잘 자라서 사회생활을 잘하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환경이 어떻든 상관없이 그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신자는 피조물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마음속에다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환경에 상관없이 항상 지금의 삶에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그리스도로 더불어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면 결국 피조물의 마음으로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고, 죄라고 하는 것도 한마디로 말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눈물은 피조물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창조주께서 만들어준 그 모습 그대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과 모습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그 어떤 좋은 환경에서 산다고 해도 결코 눈물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부르면 뭐합니까? 이미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나라가 채워져 있는데,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단지 교회에 와서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위로 받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여러분의 마음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채울 것은 채우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으로부터는 멀어지고 하나님 나라에는 가까워지려는 소원으로 교회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속마음에 돈이 없는 불만과 불안으로 가득차 있고, 자식이 변변치 못한 원망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천국에 대한 얘기를 아무리 한들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들에게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을 더 원하는 마음으로 나오셨다면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는 사람들은 세상은 더럽고 악하고 썩어지고 사라질 나라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싫을 때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즉 세상이 싫은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좋은데 무엇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겠습니다. 결국 세상도 좋고 천국도 좋다는 것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좋은 곳에서만 살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인 것입니다. 이 욕망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아무도 못 말릴 욕망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세상에 대하여 싫어지고 대신 하나님나라로 물들어 갈 때 오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의 것은 다 부숴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다시 만드시는 나라입니다. 본문을 보면 무엇이 무엇으로 된다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이 나오고, 3절에 약한 손, 떨리는 무릎, 4절에 겁내는 자, 5절에 소경, 귀머거리, 6절에 저는 자, 벙어리 혀, 7절에 뜨거운 사막, 메마른 땅, 시랑, 8절에 깨끗지 못한 자, 우매한 행인, 9절에 사자, 사나운 짐승, 10절에 슬픔, 탄식, 이런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 표현은 죄와 저주 아래 있는 세상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바꿔 놓으시겠다고 합니까? 1절에 기쁨, 백합화, 즐거움, 2절에 기쁜 노래, 레바논 영광, 사론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움, 5절에 눈이 밝아지고 귀가 열리고, 6절에 사슴같이 뛰고 혀가 노래하고, 이렇게 계속해서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시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상태를 완전히 뒤바꿔서 만들어지는 나라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상이 아닙니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정상적이지 못하고 저주 아래 있고 죄악으로 가득차 있는 세상을 다 부숴 버리고 다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새로운 나라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처럼 세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고, 세상의 것을 좀 더 많이 쌓기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4절에 보면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오셔서 보수(복수)하시고 보복하여 서 우리를 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수하시고 보복하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죄 때문에 눈물 흘리고, 괴로움을 당하고, 수고하며 살았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복수하셔서 우리를 죄없는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기쁨입니다.

제가 지금 하나님의 복수가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기쁨으로 다가오는지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복수해주신다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려면 먼저 우리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는 것입니다.

복수란 원한을 갚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피해 때문에 원한이 발생했을 때 복수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한을 갚을 힘이 당사자에게 없을 때 대신 복수해 줄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세상의 죄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죄를 이기지 못하고 때때로 죄에 끌려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탄식하고 괴로워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복수를 하나님이 대신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죄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탄식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수가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세상에 대해서 한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그냥 죄에 끌려가면서 오히려 죄를 좋아하면서 세상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복수해주시고 우리를 구해주신다는 말에 아무런 기쁨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은 좋은데 왜 복수하신다고 하느냐?'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는 '하나님, 저는 약해서 항상 죄에 붙들려 살아갑니다.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세상의 죄에 불들려 있는 자신에 대해서 탄식하고 회개하면서 하루속히 죄없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날을 고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우리편에 되셔서 우리 대신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복수하신다는 말이 기쁨이 될 것이고,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대로가 있습니다. 그 대로는 하나님나라, 깨끗한 나라로 들어가는 대로입니다. 때문에 그 길은 더러운 자들은 지날 수 없는 거룩한 길입니다. 거룩한 길은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는 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모두 더러운 자입니다. 그 누구도 거룩한 길을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린 어떤 날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날을 기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복수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실 그 날을 사모하고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고생하고 눈물 흘리고 괴로움도 당하면서 살아가지만, 깨끗함을 입고 거룩한 길을 지나서 시온으로 들어갈 그 날을 생각하고 기다리면서 힘을 얻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가 하면 10절에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다 달아날지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복수로 인해서 깨끗함을 입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시온에 이르렀을 때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고 슬픔과 탄식은 다 달아나고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날, 이 나라가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죄가 없는 깨끗한 나라가 기다려지지 않습니까? 깨끗한 나라를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은 세상의 죄에 대해서 탄식하며 살아갑니다. 죄 때문에 괴로움 당하고, 내 죄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 인생을 미워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복수해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실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이 나빠서 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죄에 매여있고 피조물의 자리에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한숨쉬며 사는 것입니다. 또 그런 여러분 때문에 이웃이 피해를 입습니다. 그럴 때 한숨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것은 전부 내 죄 때문입니다. 속히 나를 죄없는 나라로 데려가 주소서'하면서 살 때 하나님의 복수하실 날이 기다려지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고와 눈물은 모두 내 죄때문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죄없는 나라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죄없는 나라를 생각할 때 자신의 죄에 대해서 미워하게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고백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실 날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날에 거룩한 길을 지나서 시온에 이르고 영영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것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