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말 (사 36:11-22)

세상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 치고 환난과 어려움을 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불교의 승려들은 일부러 고행을 자청하기도 하지만 그 고행이라는 것은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절제를 훈련하기 위한 육체의 고통이지 세상에서 오는 환난과 어려움의 차원은 아닙니다. 또한 고행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서, 즉 자신의 정신적 유익에 장애가 되는 육신의 모든 문제를 절제하고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스스로 자청한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환난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모든 사람은 환난으로부터 도망치기를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고 한해 신수를 점침으로서 자신에게 닥쳐올 환난을 미리 피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환난을 없기를 바라거나 환난이 있다 해도 자기를 비껴 가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 있으면서 파도와 풍랑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해도 자기를 비껴 가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신자들은 믿음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몸은 바다에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 방패가 되셔서 불어오는 풍랑과 파도를 다 막아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사는 것이 곧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풍랑을 막아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실 때 풍랑이 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불어오는 풍랑을 없애주신다는 뜻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풍랑도 예수님의 다스림에 있는데 왜 너희가 나를 믿는다하면서 풍랑을 두려워하느냐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풍랑 속에서 담대하게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형편이 좋지 못한 가운데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살기가 어렵다고 아우성들입니다. 그 속에 우리 신자들도 함께 몸을 담그고 살아갑니다. 세상이 어려우면 우리도 어려울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파도가 치면 우리도 그 파도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이는데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해서 특별히 풍랑이 비껴가고 파도가 치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이기주의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나라도 하나님 덕분에 편해보자는 이기주의입니다.

인생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상에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은 신자도 함께 겪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은 신자인 사람만 특별히 고통과 어려움에서 제외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면 얼마든지 어려움을 물리쳐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나오시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진리가 관심이 아니라 내 몸 편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파도가 없고 풍랑이 불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도피 이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가 과외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과외비가 들지 않는 나라로 이민 가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어려움 때문에 어려움이 없는 나라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그 나라대로 또 다른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도 다른 나라로 도망을 치겠습니까?

파도나 풍랑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풍랑이 불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풍랑이 나를 피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인 여러분은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대합니까?

신자는 어려움을 피해서 편한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하거나, 내가 편해지는 방법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려움이 왔을 때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작은 것으로 만족하자'라고 했다면, 물론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주어진 것으로 만족할 때 행복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 목적이 하나님의 진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마음 편해지기 위해서라면 잘못이라는 얘기입니다.

내 마음 편해지기 위해서 지금의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자 애쓴다면 절대로 만족을 느낄 수 없고 오히려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 걱정과 염려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에서 내가 편해질 수 있는가?'로부터 시작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복은 진리를 알았을 때 주어집니다. '어느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라는 인생의 바른 길을 알았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진리를 알므로 마음이 자유로울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편치 못하고 괴로움과 답답함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뭔가 여러분의 마음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 사업, 돈 이런 것들이 여러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장벽인 것입니다. 이 장벽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어려움을 해결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서 내 편해지기 위해서만 고민하고 힘쓰지 마시고 어려움 속에서 내가 배울 것이 뭔가를 찾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려움에서 바른 인생의 길을 배우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편안함을 찾게 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그들을 업신여기며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잘된 것이 뭐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14절,15절을 보면 "왕의 말씀에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그가 능히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니라 히스기야가 너희로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는 것을 받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붙임이 되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히스기야를 청종치말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히스기야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우리가 지금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뢰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너희가 하나님 믿어 가지고 잘된 것이 뭐냐? 너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의뢰해도 너희의 신은 너희를 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앗수르 왕에게 항복해라 그러나 포도와 무화과를 먹을 것이고 우물물을 마실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말입니다.

하나님 믿어서 나아진게 뭐냐? 잘된 것이 뭐냐? 혹시 여러분 마음에서 이런 외침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어려울 때 이런 생각에 빠진다면 그것은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피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서 나아진게 뭐냐?'는 생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이에 엘리아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아람 방언을 아오니 청컨대 그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데서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마소서"라고 합니다. 지금 랍사게가 예루살렘을 향해서 그들을 조롱하고 협박을 하자 대신들이 랍사게에게 부탁하기를 제발 아람말로 하고 유다말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랍사게가 유다 말로 하면 유다 백성들이 다 알아듣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불안해할 것이니까 그들이 못 듣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려움을 피해가자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움을 주신 것은 그 어려움을 통해서 뭔가를 가르치고 배울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면 배울 수가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할 때 목사들이 무슨 말로 위로합니까?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십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어쨌든 불안감을 없애고 어려움을 피하도록 하는 말만하고 있고, 뭔가 어려움 속에서 진리를 배우고 인생의 바른 길을 배우도록 인도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 교회의 큰 문제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배우도록 가르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파도가 치고 풍랑이 분다고 해도 그것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천지를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가를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어려움을 주고 국가를 어렵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배우라고 우리를 파도가 치고 풍랑이 있는 세상에 남겨두신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꼭 필요한 태도는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우리는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해결하시도록 나는 뒤로 물러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는데 그것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가 불안해하고 낙심하고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려고 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란 해결되면 또 다른 어려움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해결되기만 바라고 있다면 항상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신다면 어떤 파도가 와도 바윗돌 같이 서있게 될 것입니다.

파도가 없기를 바라지 말고, 파도를 피하려고 하지 말고 파도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여러분은 뒤로 물러나십시오. 우린 단지 하나님이 하실 일만 바라볼 뿐입니다. '하나님 믿어도 별수 없다'는 사단의 말에 빠지지 않고 파도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배워가는 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