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사 37:1-7)

지난 시간에는 앗수르의 장군인 랍사게가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너희가 하나님을 믿어서 잘된 것이 뭐냐?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믿지 말고 힘있는 앗수르 왕에게 항복해라 그러면 잘먹고 잘살 수 있다'는 말로 이스라엘을 조롱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것을 사단의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들게 하고, 하나님을 믿어도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믿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 곧 사단의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에서 누군가가 나를 조롱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혔을 때 내 안에서 내 본성이 외치는 소리일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랍사게의 조롱의 말을 들은 히스기야가 취한 행동을 통해서 신자가 어려운 난관에 처했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어려울 때보다 평안할 때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평안해야 교회 일도 잘하고, 돈이 넉넉해야 헌금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모두 하나님 탓, 환경 탓으로 돌려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에게 있는 어려움은 단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걸림돌로만 여겨지게 될 것이고, 신자들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신앙의 길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속히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만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하나님을 조롱하고 믿음을 조롱하고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가 버티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이스라엘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혹시 '하나님 저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저 사람을 심판하셔서 하나님의 무서움을 보여주십시오.'라고 하지는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이 혹 자신의 자존심 문제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믿음을 조롱하는 것에 대한 분풀이는 아닌지 생각해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항상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즉 자신을 조롱하고 욕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해서 화만 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왜 내 앞에 저 사람을 세우셨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일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나는 행복 할텐데'라는 생각에 빠져들면서 지금의 상황을 자기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기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들의 사고방식 속에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일 때문에' '너 때문에' '저 교회 때문에'라는 생각들이 상대방을 미워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 때문에 안돼' '이 일 때문에 안돼' '이것만 없으면' '저 사람만 없으면'하는 생각들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며 사단의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고, 나보다 잘되는 이웃들이 내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너 때문에 안돼'라는 생각이 앞서 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기고 누르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악에 빠져 산다는 것은 전에는 악에 빠지지 않았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서 악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악을 가진 채 태어납니다. 악은 평소에는 감추어진 채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을 때 드러나지 않던 미움이 드러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신자 앞에 신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자를 세우셨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드러나지 않은 악을 드러내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욕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사람을 세우심으로 '너도 저 사람과 같이 남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욕하는 악이 있지 않느냐?'는 것을 발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자기를 조롱하는 자를 향해서 미움을 가지고 욕을 하고 같이 조롱함으로서 자신도 저 사람과 똑같은 악을 가지고 있는 죄인임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하고 '너 때문에'라는 생각에 빠진 채 미움을 드러내고 상대방과 같이 조롱한다면 그것이 곧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인 가인을 세상에 남겨 두시고 보호하시는 것도, 인간에게는 누구나 가인과 같은 악이 있음을 가인을 통해서 발견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랍사게가 이스라엘 앞에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랍사게의 말을 듣고 동요되고 마음이 흔들리면서 하나님의 향한 신뢰가 사라져 버린다면 평소 하나님께 제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신앙이 가짜였음이 들통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조그만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 교회가 평소에는 하나님만 섬긴다고 하고 말씀으로만 살자고 가르치는 교회였는데, 어느 날 다른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얼마 되지 않아서 기존에 있던 교회보다 더 커졌다고 할 때 평소에 하나님만 섬기고 말씀으로만 살자고 외쳤던 믿음이 진실된 것이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참된 믿음이었다면 다른 교회가 커지든 말든 관심 두지 말고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님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보다 부흥된 다른 교회를 보면서 '우리 교회는 뭐하나? 우리 교회는 왜 부흥이 안되나?'라고 하면서 '하나님, 우리 교회가 부흥되게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다른 교회가 들어오기 전 평소에 하나님을 찾고 말씀을 중심으로 산다고 했던 그 믿음은 진실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른 교회를 들어오게 하신 것은 아무 뜻이 없이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을 점검하라고 하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염두에 두고 히스기야의 행동을 살펴볼 때 참된 믿음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궁내 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를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랍사게가 조롱하는 말을 듣고 두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하나는 여호와의 전으로 간 것이고, 또 하나는 대신과 사람들을 이사야 선지자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이런 히스기야 행동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는 것, 즉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했다는 것이나, 선지자를 찾아간 것, 즉 오늘날 목사를 찾아가서 상담하는 것은 우리들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행동을 쉽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령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여러분의 가족, 또는 친척 중에 권력이 있거나 재물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 기도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 다 찾아보고, 힘있는 사람 다 찾아보다가 이도 저도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이나 불러보자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목사를 찾아오는 것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고 성경적인 길인가를 찾아가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세상에 아는 사람도 없고 힘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도 사람을 많이 아는 목사에게 의논하면 뭔가 해결의 길이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으로 목사를 찾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히스기야의 행동을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은 앗수르의 싸움에서 힘으로 대항하겠다는 생각은 버렸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싸우시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찾는 것은 '나는 세상 문제를 세상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겠다. 이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에게 대신을 보낸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앗수르를 물리칠 수 있는 지혜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앗수르를 이기도록 하나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선지자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히스기야는 선지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알았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일을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잘 알고 히스기야가 세상적인 방식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가 앗수르를 바라보는 시각과 같은 시각으로 앗수르를 바라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교회 목사에게 상담을 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선지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선지자들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상담하러 왔을 때 무슨 말을 해주겠습니다.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만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에만 관심을 두고 산다면 어떤 상황을 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그 일을 통해서 말씀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낸 것은 일을 해결하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를 물어보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오직 문제 해결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빨리 문제가 해결되어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하고만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신앙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자 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문제 해결이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인도해 가시든 나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쓰여지고 말씀을 이루는 일이 되게 하소서'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고 했던 믿음이 어떤 상황을 통해서 진실된 것으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전에는 믿음이 있는 줄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다는 뜻이 아니라 평소의 믿음이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진실된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조롱 앞에서 여호와의 전을 찾고 이사야 선지자를 찾는 것은 한마디로 '자기 포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포기란 이 상황이 자기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 해결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찾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의 뜻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앞세우고자 하는 믿음입니다. 기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기도는 자기를 포기한 기도뿐입니다. 기도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고백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자기 포기가 없는 기도는 자기 탐욕이지 절대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평소 편안하게 살아가는 삶에서 고백을 했다고 하더라도 진실의 여부는 어려움과 난관이 발생했을 때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는 항상 자기 손해를 싫어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뜻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자는 어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고자 할 때 자기의 이익은 포기한 채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어려움 당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어려움을 당하고, 조롱 받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어떤 조롱도 받겠다는 입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헛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으로 만족하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주님의 도구만 되려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자기의 이익은 포기한 채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자기를 포기하고 기도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힘쓰십시오. 이것이 신자가 할 일입니다. 자기가 포기되어 있지 않은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내가 포기되어진 그 자리에서만 하나님이 보여지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