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열심 (사 37:30-35)

지난 시간에는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 올 때는 자기를 포기한 자세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기를 포기를 자세로 나오지 않을 때 우리는 자기 안에서의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대군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고 랍사게의 말대로 항복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의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은 하루속히 이 난관에서 무사히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은 불신자나 신자할 것 없이 누구나 가지는 마음입니다.

랍사게가 지금 조롱하고 있는 말도 그와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조롱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어봐야 필요 없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틀림없이 자기들의 신에게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세상 모든 종교의 공통된 것입니다. 때문에 랍사게는 이스라엘도 당연히 이런 어려움에서는 자기들의 신인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너희들의 하나님은 너희를 건지지 못한다'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때 이스라엘의 신앙은 항상 세상적인 힘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불신앙으로 가득차있었고, 그런 그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앗수르를 그들에게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이 앗수르가 자기들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의 이유도 모른 채 단지 지금의 난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으로만 가득차있다면 랍사게의 조롱은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봅시다. 앗수르가 포위하고 랍사게가 조롱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무조건 난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난관을 주셨는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과연 랍사게의 조롱에 마음이 흔들리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난관은,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도록 하시기 위해서 내 앞에 두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거기에 순종하겠다'라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때, 랍사게가 하는 조롱들이 이스라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으면 삽니다. 그럴 때 우리는 불신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라고 할 때, 평소에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일이 잘되고 복받아 잘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불신자의 말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 어려움을 통해서 나를 가르치신다. 때문에 내가 망하는 것도 흥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서 난관에서 건짐 받는 것보다는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자 하는 믿음으로 가득차 있다면 '당신의 하나님은 뭐하느냐?'라는 불신자들의 조롱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 올 때는 자기 포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전을 찾고 선지자를 찾은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인 것입니다.

그후에 8절을 보면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랍사게가 돌아가다가 앗수르 왕을 만납니다. 그러자 앗수르 왕은 다시 사신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어서 여호와의 도움을 믿지 말고 항복하라는 서신을 전하게 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난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있다면 눈앞의 전세를 살펴보면서 낙심하고 앗수르의 왕의 편지에 마음에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가지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펴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 산헤립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는 말을 듣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이 참된 신이심을 증명해 달라고 합니다.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이사야가 전하게 되는데, 응답은 여호와께서 앗수르의 패망을 결정하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은 앗수르를 비웃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후에 오늘 본문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구절은 32절입니다.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남는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남는 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떨어진 자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즉 모두가 아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도 마지막 때까지 남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필연코 있어야 하는 일은 남는 자와 떨어진 자를 구분하는 작업입니다.

32절에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것은 마지막까지 남는 자가 있게 하기 위한 여호와의 열심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여러분이 마지막까지 남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열심입니까? 여호와의 열심이 여러분을 남는 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힘쓰고 열심을 내어서 마지막까지 남는 자가 됩시다'가 아니라 '우리를 남는 자가 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합시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을 떠나고 세상으로 흘러가 버릴 더러운 우리들을 마지막까지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께 자신을 맡기는 남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는 자가 나타낼 신앙의 태도는 '내가 지금 나 된 것은 오직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이고 은혜이지 내 열심이 아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내 열심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신자가 이것을 안다면 자기의 신앙의 열심을 자랑할리가 만무합니다. 때문에 교회가 신자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열심을 내어서 신앙을 유지하도록 유도하고 독려하는 것은 신자를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앙으로 이끌고 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자들에게 스스로의 열심을 강조하고 열심을 확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모 교회는 98년 새해가 되어서 전교인에게 성경쓰기라는 새로운 상품을 제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해 동안 교인들이 심심해하지 않을 상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직접 손을 기록해서 그것을 가보로 삼고, 성경을 쓰기 위해서 하루의 십일조를 드리자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경을 자신의 손을 직접 기록하는 것을 믿음의 위대한 증표인 것처럼 위조하고 있고, 말씀의 은혜를 받는 귀한 통로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열심으로 신앙을 유지하도록 하는 마귀의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손을 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위대한 신앙의 행위로 여기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손으로 기록을 했든 안했든 중요한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비록 내 손으로 기록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정성과 노력으로 성경을 기록한 것을 보면서 스스로를 대견해 할 것입니다. 그것을 불태워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결국 주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성과 노력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기록해서 가보로 삼자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남은 자를 남은 자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상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18만 5천명이라는 앗수르의 군대들이 이스라엘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전혀 힘이 없는 나약한 상태입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앗수르를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앗수르가 물러갔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기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도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난관에 빠져 있습니다. 그 난관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그들 앞에 두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 즉 뭐든지 자기들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안되면 세상의 힘을 빌려서라도 해결하려고 하는 습성을 깨뜨리기 위해서입니다. 남는 자는 자기 열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에 자기를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 앞에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을 있게 하셔서 우리들이 과연 내 열심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열심에 자기를 맡기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시기 위해서 난관을 두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열심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 생명도 맡기고 살아가십니까? 사실 지금의 시대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목숨이 왔다갔다는 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지금 세상에서 우리에게 어떤 난관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난관들은 믿음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는 시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어버리는 난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난관을 이기지 못한다면 과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있다고 할 때 생명까지도 주님께 맡기는 신자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신자는 어떤 어려움이 왔을 때 그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정도의 어려움에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어려운 난관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으로 굳게 서 있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해 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남는 자의 신앙의 모습인 것입니다.

30절에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금년에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이 년에는 또 가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제 삼 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황은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이사야는 지금의 난관을 이기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금년도 내년도 삼년째도 먹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상황이 우리를 끝장내지는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사야는 눈앞의 상황에 전혀 당황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신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남들 보기에는 당황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먹는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시각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난관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첫째 이유가 자신의 어려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 '나는 이런 일을 당할 만큼 나쁜 일 안했다?' '신앙 생활 잘했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 이런 식으로 자신은 어려움을 당해서는 안될 사람으로 여길 때, 어려움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당황하고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사야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어려움이 나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욥과 같이 주신 분이 여호와이신데 가져가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시각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인간인데, 이런 나를 이 정도의 일로 깨우치게 하시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남는 자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흔들어 놓는 과정을 통해서 거룩한 씨만 남게 하는 여호와의 열심을 알았습니다. 결국 남는 자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난관과 어려움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계시입니다. 흔들고 떨어내는 작업이 없으면 마지막까지 달려 있는 남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신자는 흔들림 받는 난관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난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는 자로 만드시기 위한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난관을 당연하게 여기시고, 내가 아직 인간이 덜되었기 때문에 난관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고, 하나님이 난관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고 마음 흔들리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 풍파를 거치면서도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내 열심이 아니라 여호와의 열심 때문이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남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떤 난 관속에서도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것이고 파도와 풍랑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평안을 맛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