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기도 (사 38:1-8)

지난 시간에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유지되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할 때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즉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를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 마땅한 것이고, 삶은 삶대로 다르게 간섭하시고 유지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과 믿음의 부분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천국 가기 위한 것으로, 삶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것으로 따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삶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의 믿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붙들려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잘살도록 하기 위해서 붙드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을 통해서 믿음이 훈련받고, 삶을 통해서 믿음이 증명되고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하나 하나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치시고 훈련시켜서 마지막때 남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간섭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난관도 있게 하시고 고통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어려움이 있을 때 무작정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면 안됩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믿음을 배워가고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노력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 주신 난관과 어려움이라면 그속에서 믿음을 배우고 구원을 이루려고 힘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난관에서 벗어나게 하시든 더 큰 난관을 주시든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일뿐입니다. 신자는 단지 하나님이 주시는 하루하루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뿐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뜻을 이루는 삶인가를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많은 신자들에게 유혹이 되는 내용일 것입니다. 본문은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수명이 15년이나 연장됐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또 해그림자가 뒤로 10도나 물러가는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신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성경을 볼 때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나도 기도해서 저런 응답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명이 15년 연장됐다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병들었을 때 기도하면 수명이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에 관심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단지 수명연장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그것은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욕망입니다. 물론 입버릇처럼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소망둘 것이 없을 때 낙심가운데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신자는 단지 수명 연장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떻게 살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수명을 연장시켜주신다면 여러분은 연장 받은 수명을 무엇을 하며 살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으시다면 왜 오래 살고 싶으신지를 스스로 물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얼마를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세월 동안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 인생을 무엇에 허비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살면서 그 인생을 모두 자기의 세계를 이루는데 허비해 버립니다. 이것을 허랑 방탕이라고 말합니다. 탕자가 왜 탕자였습니까? 탕자는 술먹고 노름하면서 돈을 탕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 탕자는 달리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해서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한 것 때문입니다. 나도 내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것, 이것을 가지고 탕자라고 합니다.

탕자는 자기의 세계를 이루어보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리고 실패 속에서 아버지를 찾습니다. 이제는 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라면 종으로 살아도 좋다는 것이 실패한 탕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삶을 버리고 아버지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필연코 실패가 필요합니다. 독립된 자기 인생, 자기 세계를 살아보려고 한 속에서 실패했을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허랑 방탕이란 자기의 세계를 꿈꾸면서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땀흘리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모두 자기를 위해서 허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히스기야의 수명 연장에 매력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기를 위한 인생을 더 살고 싶어하는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자기의 소유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려주신 생명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데 사용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단지 더 사는 것에 목적을 두고 기도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더 살고 싶고, 또 더 살기 위해서 기도하고 싶다면 이렇게 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지금까지 헛된 인생을 살았는데 이제야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제가 그 참된 인생을 조금이나마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것이 참된 인생을 아는 신자가 할 수 있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더 살게 해달라는 기도는 병들었을 때나 죽을 지경에 빠졌을 때 하는 기도로 여깁니다. 지금 나는 건강하니까 살기 위한 기도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은 건강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은 여러분은 하루하루 사는 것을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어제 죽어야 할 인생이 또 하루의 삶을 연장 받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병들어 기도해서 병낫는 것만이 연장 받은 삶이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모두 연장 받은 삶입니다. 내 인생을 살아라고 연장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인생을 살아라고 연장시켜 주셨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15년 수명이 연장된 것이나, 여러분이 오늘 이시간 기도하고 나서 내일 죽지 않고 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일 살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는 내일도 틀림없이 눈뜨고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하니까 죽을 조건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굳이 지금 기도하지 않아도 내일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사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살려주기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히스기야가 수명이 연장된 것이나 우리들이 내일을 사는 것이나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수명 연장이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단지 죽기 싫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1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가 '너는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서 히스기야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우연히 죽을병에 걸려서 죽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2,3절"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히스기야의 통곡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죄에 대한 통곡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음을 당해야 할 죄를 보게 된 것입니다. 5절 뒤에 보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이것은 눈물 속에 실려있는 죄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죄를 드러내며 통곡하는 히스기야를 보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은 죄인이고 그로 인해서 죽어 마땅한 자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할 자가 어떻게 살아있느냐는 것까지 보게 됩니다. 3절에 보면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라고 하는데, 이 말은 자신이 옛날에 선한 일을 했으니까 그것을 보시고 자기를 살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속에 선한 분이 계실 때 그 분에 의해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해 달라는 기도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죄인이 지금까지 선한 분에게 붙들려 있음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 앞에서 자신을 바라본 히스기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결코 우리들의 힘이 아닙니다. 선한 분에게 붙들려 있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하루하루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을 자기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린 이것을 히스기야가 말한 선하게 행한 것이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

히스기야가 말한 선하게 행한 것이란 왕이라는 직책과 연관이 있습니다. 왕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 사는 자입니다. 왕이 자기를 위해서 살 때 백성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왕의 위치입니다. 히스기야는 이 왕의 위치에 제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6절)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약속에 대한 징조로서 일영표의 해그림자가 뒤로 십도를 물러가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8절에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 가니라"고 말합니다. 아하스의 일영표라는 것은 아하스가 만든 해시계라는 뜻입니다. 아하스가 만든 일영표의 해그림자가 해는 가만히 있는체 뒤로 십도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하스의 일영표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런 징조를 보여주십니까?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항상 세상의 힘과 지식을 의지하고 살았던 왕입니다. 세상의 기술과 지식으로 이스라엘을 얼마든지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왕입니다. 해시계는 과학입니다. 즉 인간의 부강과 발전을 위한 지식입니다. 아하스는 이것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힘과 지식을 더 필요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하스를 앗수르를 보내어서 징계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의 지식과 재능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임을 보여 주심으로서 앗수르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징조를 본 히스기야가 할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고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연장 받은 삶을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의 세계를 부정하십니다. 자기의 힘과 지식과 재능을 동원해서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아하스의 세계를 부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병 앞에서 자신의 인생은 죽어야 하고 실패할 인생이지만 선한 분에 붙들림으로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가십니까? 입술로는 여호와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을 의지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죽어서 심판에 들어갔어야 할 죄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우리들이 선한 분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연장된 수명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선하게 행하며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이나 과학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자기만의 세계가 있거든 그것을 부수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사랑하면서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루하루를 연장된 삶으로 여기고 여러분 자신의 세계는 무너뜨리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면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바르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앗수르의 손에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도 이어질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