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현실 (사 39:1-8)

영화나 드라마의 마지막은 항상 관객이나 시청자로 하여금 행복을 상상하도록 합니다. 어려움과 역경을 견뎌낸 주인공들이 이젠 그 대가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여운을 남겨주는 것이 영화이고 드라마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자신의 행복을 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착각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인생을 보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같이 좋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그런 때가 없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내 인생이 행복하다고 해서 내일도 계속 행복하다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입니다. 오늘의 좋은 것이 내일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바램이고 욕망일 뿐 현실은 아닙니다. 즉 오늘의 행복이 내일의 행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내가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서 내일도 믿음으로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내일은 믿음을 팽개쳐 버리고 엉망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 내일도 그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 속에 어둠의 세력, 즉 죄의 본성이 깨끗이 청소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는 깊숙한 곳에 숨겨지고 드러나지 않는 것이지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가 어떤 조건과 환경이 충족될 때 정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비록 죄가 드러날 조건이 충족되지 못해서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도 내일은 어찌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결코 오늘의 믿음에 만족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되며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말씀을 통해서 점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할 때는 지금의 내 신앙 정도라면 어떤 죄의 유혹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생각은 잘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생각 자체가 이미 죄의 유혹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현실이라는 문제와 부딪혔을 때 그 모습이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때문에 방구석에 앉아서 가끔 기도하고 성경이나 들여다보는 것으로 '내 믿음 좋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죽음을 앞에 둔 히스기야가 회개의 기도를 하고 난 후 생명이 15년이나 연장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루하루가 하나님에 의해서 연장되어 가는 삶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히스기야가 15년 생명이 연장된 것에 대해서 부러워 할 필요가 없으며 하루하루 연장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여지기 위해서 연장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 맞습니다. 내 생명은 하나님이 연장시켜 주신 삶인데 앞으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교회로 모여서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에 감동이 되고 기도할 때 이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즉 여러분의 결심을 흔들리게 하고 부딪히는 현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결심하고 기도하면 뭐합니까? 여러분께 부딪히는 현실에서 여러분이 결심하고 기도한 그 믿음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기도는 물거품에 불과할 것이고 천번 만번 결심했다고 해도 하늘에 흩어지는 구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히스기야는 눈물로 기도해서 생명이 15년 연장 받았습니다. 여기까지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볼 때 우리는 앞으로 히스기야는 철저하게 신앙으로 잘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기도해서 살아난 히스기야가 죄를 지을 리가 없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큰 잘못을 저지릅니다. 믿음이 있고 은혜 받은 사람이 그럴수가 있는가? 라는 의문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인간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입고 죄를 지은 히스기야가 천당갈 수 있는가? 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개인의 구원문제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본문을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에게 무엇인가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들이 히스기야와 같은 실패 속에서 살고 있음을 히스기야의 실수를 통해서 지적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실수는 바로 우리들이 현실 속에서 늘 하는 실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왕이 글과 예물을 보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사신을 맞아서 어떻게 했습니까? 2절에 보면 궁중 보물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무기고와 보물창고에 있는 것들을 다 보여줬다고 합니다.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히스기야가 사신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보여준 것은 '우리도 너희들만큼은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바벨론은 힘이 강한 나라이며 부강한 나라입니다. 그 큰 나라의 사신 앞에서 '우리도 당신들만큼은 세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히스기야의 실수이고 죄악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이 연장된 사람입니다. 자기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철저하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때만큼은 히스기야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고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일 것입니다. 그런 히스기야라면 그가 바벨론 사신에게 보여줄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궁중의 보물이 아니라 자기를 낫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바벨론 왕에게 '내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말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수입니다. 복의 내용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은 육교 위에 거지에게 동전 하나 던져 주듯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한 분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희생하신 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단지 복받은 것을 자랑합니다.

복이란 무엇을 얼마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주셨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받은 것을 보여주고 자랑하지 주신 분을 자랑하고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히스기야가 이 실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히스기야에게 갑자기 이사야가 나타나서 묻습니다. 4절에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당연히 이스라엘을 유지하고 있는 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보물과 무기를 보여준 것은 바벨론과 똑같이 보물과 무기를 자기들을 유지하고 있는 힘으로 내세우는 불신앙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의 본성입니다. 힘있는 사람 앞에서 자신도 힘이 있음을 과시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이 히스기야를 그런 실수로 이끌어 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것으로 기를 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선 신자들도 세상 것을 가지고 그들을 이기려고 하고 기죽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본성으로 살아갈 때 과연 무엇이 보여지겠습니까? 상대방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세상 것을 자랑하고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사실 신자들은 하나님 은혜로 산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령 출세한 아들을 둔 사람 앞에서 '내 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전혀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무시당하고 조롱 받을 말이란 것을 압니다. 때문에 세상 것을 자랑하는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보이지를 못하고 그들과 같이 세상의 것으로 맞부딪히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하나님의 힘으로 세상을 살고 있음을 믿습니까? 진심으로 이 믿음이 여러분의 중심이 되어있는지를 확인하시려면 삶속에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힘썼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살리고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만 보이려고 했는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고 내 자존심을 세우고 자랑거리가 될만한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는 세상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보여줘야 할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 것을 보여주려고 하고,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보여주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여주라고 오늘도 살려주시고 은혜로 지켜주시고 건재하게 하신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6절에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히스기야가 자랑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다 바벨론으로 보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무엇을 자랑하며 사십니까? 여호와 말고 자랑하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다면 오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는 자기의 소유된 것은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좋은 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합니다. 이 습성이 우리를 실패의 자리로 끌고간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어떤 직책도 보이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직책이 높아지면 그 직책을 내세우고 싶어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목사 장로들이 이 유혹에 쉽게 빠져듭니다. 목사나 장로를 높은 직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겸손해 보이던 사람들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된 후에는 목사 장로라는 직책을 보이고 직책을 휘두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책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십자가의 피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에게 있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십자가의 피만 전하고 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목사라는 직책이 아까워서 십자가의 피를 전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목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의 실수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히스기야의 실수가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서 오늘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합니다. 히스기야의 실수와 실패가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실수를 발견하고 '하나님, 제가 바로 히스기야같이 실패하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신앙은 오래 믿는다고 해서 좋아지고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를 믿었든지 '나는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는 것을 우리의 현실에서 제대로 드러내고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나 믿음 좋다' '내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바르게 살 수 있다'라고 큰소리 치지만 말고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현실에서 신앙이 제대로 드러나도록 힘쓰십시오. 히스기야처럼 주어진 것을 자랑하고 보려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 사라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린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자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항상 하나님만을 보여주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