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로 (사 40:1-11)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연장된 인생을 살아가게 된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신 앞에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보이게 된 실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히스기야는 힘을 가진 자 앞에서 자신도 역시 힘을 드러냄으로서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실수는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무엇을 자랑하며 무엇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실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힘에 강한 유혹을 느낍니다. 힘이란 인간의 욕망을 충족 시켜주는 제일의 조건입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의 영광을 높이고, 많은 자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고자 하는 욕망은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힘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소유하고자 원했고,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을 정도입니다.

한국교회가 은사를 중요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은사가 곧 힘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은사를 주시는지가 관심이 아니라 은사가 힘이 되는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기도를 더하고 성경을 더 볼 때 그것을 자랑삼아 내세우고 자기보다 덜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힘으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로 산다고 하면서도 그 은혜를 자기 속에 간직하고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을 드러내는 인간의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 어리석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은혜를 아는 히스기야가 실수를 한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히스기야의 실수는 우리 자신의 믿음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자기가 자기를 생각할 때는 신앙의 실수를 하지 않고 믿음으로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인간은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면 결국 자기 중심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기 믿음을 키우려고 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믿음을 키워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래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래탑은 처음에는 쌓아져가는 것 같지만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높은 모래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래탑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낫는 경험을 했다고 해도 '나는 무너지는 모래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병이 나으면 병이 나은 자기 몸을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나는 은혜를 입었다'라고 하면서 자기와 같은 경험이 없는 다른 사람을 누르는 것입니다. 병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병이 나은 것을 통해서 은혜를 배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렸는데 기도하고 나았다고 해도 그 몸이 특별한 몸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죽을 몸입니다. 그렇다면 병이 나아서 좀 더 산 사람과 병이 낫지 못하고 죽은 사람과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좀더 산다는 것 외에는 아무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10년을 더살고 100년을 더 살면 뭐합니까? 죽어서 멸망으로 떨어진다면 얼마를 더 살아도 실패한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인생이라면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병이 낫든 낫지 않든 그것이 관심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쌓아보려고 하는 것은 모래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결국 인간은 무너질 것에 불과한 것을 힘으로 삼고 자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모래탑을 쌓으려고 한 순간부터 불행은 시작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모래탑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행복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히스기야에게 이사야를 보내서 예언을 합니다. 히스기야가 자랑한 모든 것을 바벨론에게 빼앗기게 할 것이고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서 환관이 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예언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뜻밖입니다. 8절에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이른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서 '그 말씀이 좋습니다'고 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런 반응을 하는데 대해서 한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사야의 말을 통해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실수를 알고 난 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하시겠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은혜만 드러내는 참된 이스라엘로 만드시기 위한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한 말씀이 좋았던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이상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해서 근심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과 견고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마음입니다.

인간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모래탑을 쌓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래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모래탑을 모래탑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소망을 성취시켜줄 희망으로 보기 때문에 모래탑이 무너질 때마다 실망을 하고 불행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있는 모든 것을 모래탑으로 보셔야 합니다. 자식도 재물도 직장도 모든 것이 모래탑 같은 것입니다. 무너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래탑을 모래탑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모래탑을 의지하다가 실망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래탑의 행복은 잠시 잠간이고 그 순간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위로는 세상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고생하고 힘들게 살 때 그 모든 보상을 자식이나 재물을 통해서 받으려고 합니다. 자식이 성공하는 것으로 보상받고 위로 받으려고 하고, 돈이 모아지는 것으로 위로를 삼으려고 합니다. 남편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모래탑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간이 기대하는 위로입니다. 그러나 신자된 우리의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세상 것이 결코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1절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앞에서 이스라엘이 포로될 것에 대해서 예언을 한 뒤 위로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가 전하는 위로가 어떤 것인가를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위로가 될 수 없는 것으로 위로를 삼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아 고생했다. 이제 포로생활은 끝났다. 고생한 대가로 앞으로 편안한 삶만 주겠다'는 위로를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 포로 되게 하신 것은 교만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교만을 깨닫지 못하면 죄를 알 수 없고 죄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교만하고 자기의 힘을 내세우기 때문에 은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내 힘가지고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나는 내 믿음 가지고도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믿음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기 믿음으로 하는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이고, 은혜란 바로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로 다가오시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지금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의 신앙을 보면 대다수가 자기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주는 것이지 은혜로 주어진 믿음에 감사하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에 대한 자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 믿음 가지고 내가 기도하고, 내 믿음 가지고 내가 성경보고, 내 믿음 가지고 내가 봉사하려고만 하지 은혜로 성경보고, 은혜로 기도하고, 은혜로 봉사하게 되어진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 믿음 가지고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버리십시오. 우리가 뭔가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서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신 것이지 내가 믿음이 좋아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3-5절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바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깨끗이 밀어서 평지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마음이 낮아져라는 것입니다. 높은 마음에는 주가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마음이 주님을 밀쳐내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말하는 '외치는 자의 소리여'라는 말은 세례 요한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외침도 결국 주가 오시니까 마음을 낮추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마음이 낮아지지 못하면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까? 6-8절을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이 서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낮아지는 마음은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는 것을 아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임을 마음에 담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모래탑이 무너질 때 불행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행복한 삶은 사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다. 나는 모래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것에 대해서 전혀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육체에 대해서 기대도 없고 스스로 쌓은 것이 없기 때문에 무너질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의 행복은 마음이 낮아지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리 잘나 보여도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세상을 풀로 보십시오. 그럴 때 세상의 가진 자들, 힘있는 자들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10절의 말씀대로 우리가 고개 숙일 강한 분은 오직 여호와 한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는 사라질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풀이라는 것을 알 때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는 이것을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위로를 받고자 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 세상 것을 통해서 위로를 얻고자 하신다면 불행은 더욱 쌓여갈 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쌓아 가는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모래탑입니다. 나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지금 많은 신자들은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지만 그 속에는 예수가 아닌 마귀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라 마귀의 것이 튀어나옵니다. 자기 자랑이 나오고 교만이 나오고 힘이 튀어나오고 욕심이 튀어나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서는 무엇이 튀어나오는지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나는 풀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세상을 풀로 보면서 살아갈 때 여러분에게서는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높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높이며 살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어서 세상 일로 마음 흔들리지 않고 주님으로 가득찬 신자 되어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