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인간 (사 40:12-26)

신자들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정작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것이 말로 그쳐버리고 실제 삶에서 표출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면 분명히 그 모습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세상과 판이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악인이 잘되고 의인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떡을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해서 살고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나 믿음이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불변입니다. 우리가 편안할 때나 어려울 때나 믿음과 말씀은 동일했습니다. 그렇다면 편안하게 살 때 은혜와 사랑을 말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다면 어려워졌을 때에도 변함없이 동일한 믿음이어야 편안할 때의 믿음이 진짜였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안할 때는 교회도 잘나오고 봉사도 열심히 하다가 막상 어려워졌을 때에는 은혜라는 말도 입에서 사라져 버리고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주느냐?'는 원망을 한다면 앞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단지 편안함을 즐기는 여유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믿음의 모습이 언제나 불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이고 은혜도 사랑도 불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된다고 해도 말씀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고 난 뒤에 이런 노래를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한 그 상황대로라면 한마디로 망한 인생입니다. 하는 일마다 안되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만으로 가득 차고 나는 사라질 때 가능합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 속에 자기만을 가득채운채 삽니다. 자기 외에 다른 것이 들어오기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고 남들보다 더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자기로 가득채운채 살기 때문에 자연 인생이 힘들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IMF라는 것 때문에 회사마다 정리해고를 한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직장인들이 불안에 떨면서 회사를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 불안이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안은 결국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실패하면 안돼' '나는 잘돼야해' 이러한 생각들이 자신을 불안과 공포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자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로는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대신 나는 사라질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세상에서 악인이 잘되고 번성하고 의인은 오히려 고통받는 것을 보면서 번민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 할 때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소위 악인은 벌을 받아서 고통받고 못살아야 하고 반대로 의인은 복을 받고 잘살아야 한다는 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들의 마음과 같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고통을 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너희들이 고통을 받으면 안될 이유가 어디있느냐?'라는 얘기를 하십니다. 이스라엘도 똑같이 악인이다는 것입니다. 피흘린 자들이고 우상을 섬긴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박국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가 자기를 바로 보게 되고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나는 이런 일을 당하면 안돼'라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장 일어나는 반발은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느냐?'라고 반발합니다. 자신을 좀 더 높이 두려고 합니다. 도둑질을 한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한번 했는데 저 사람은 열번 했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꼭 선의 위치에 두려고 합니다. '나는 강도질을 했지만 저 사람은 살인을 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의 비중을 반감시키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평소 이방인과 다르다는 생각에 살아왔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똑같다고 하십니다. 같은 악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의해서 하박국 선지자는 평소에 잘난 인간인줄 알았던 자신도 역시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어떤 고통을 겪든 그것은 당연한 결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기를 아는 자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높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높여드릴 수 있습니까? 입으로 '높으신 하나님'라고 한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내가 낮아지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내가 낮아질 때 자연히 하나님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르는 풀이고 시드는 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바다 물을 손바닥으로 헤아려 본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을 뼘으로 재어본 사람이 있느냐? 땅에 있는 티끌을 되에 담아본 사람이 있느냐? 산들을 저울에 달아본 사람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어느것 하나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물음을 하신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조차 헤아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5절을 보면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라고 합니다. 열방이란 세상 모든 나라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하나님보시기에는 통에 있는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다는 것입니다. 물통에 한 방울의 물은 표도 나지 않습니다. 저울에 티끌이 있어봐야 무게를 잴 수 있습니까? 이처럼 세상의 모든 나라를 합해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나 하나는 뭡니까? 세상의 모든 나라도 한 방울의 물인데 세상의 모든 나라에 비하면 나하나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 나하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면 나는 뭡니까? 티끌보다 더 못한 존재가 아닙니까?

한 방울의 물보다 못하고 티끌보다 못한 존재가 무엇을 한들 하나님은 그것으로 기쁨을 삼지 않습니다. 16절에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고 합니다. 티끌보다 못한 우리가 레바논의 짐승을 모두 잡고, 산의 나무를 다 잘라서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은 그것으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또 17절에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나라를 없는 것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단순히 높으신 분이다 크신 분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하심으로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크신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크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자연히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할 자격도 없고 걱정할 자격도 없는 것이 바로 인간임을 알 때 제대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티끌 같은 자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아왔습니다. 누구에게 욕먹고 무시당하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티끌이고 마르는 풀이고 시드는 꽃인데 그런 하찮은 자기를 세상에서 대우받아야 할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이 하나님을 높으신 하나님 크신 하나님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생각이 주어진 환경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은혜, 사랑은 불변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내가 망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높임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의 무엇으로 치장을 해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서울대 나온 사람과 초등 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티끌보다 못한 인생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여유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신자들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항상 뭔가에 쫓기듯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짜증내고 슬퍼하고 번민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피곤하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항상 자기를 바라보고 살아가고, 자신이 잘되는 것에 삶의 보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유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좀더 나은 환경을 기대하고 내가 높아지기를 소망하며 사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불만을 가지게 되고, 불만은 짜증으로 이어지고, 짜증 속에서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나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자가 하나님 안에서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능히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욕먹어야 할인간이고 무시당해야 할 인간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여유 있는 믿음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에는 내가 높아지는 것은 없습니다. 은혜라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받아야 할 은혜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편안한 삶으로 인도해 갑니다. 인간의 근심 걱정은 작아지는 것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낮아지든 작아지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무화과에 열매가 없어도 여호와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자기 문제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집착할수록 깊은 고민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기에게 집착될 때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상기하십시오. 나는 생각하지 말고 천국을 생각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천국은 변함없이 존재하며 우리를 기다립니다.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피곤치 아니하다는 것은 몸이 피곤치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피곤치 않음을 말합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몸의 피곤을 느끼지 못합니다. 현대인의 피곤은 자기를 바라보고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곤치 아니한 삶은 자기의 문제로부터 벗어난 사람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실체를 깨닫고 높으신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상관없이 여호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피곤치 않고 힘있는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