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종 (사 41:1-16)

인간은 한평생 수평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갑니다. 단 한번도 수직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해보지도 못한 채 땅에서의 삶을 마감합니다. 수평적인 삶에서의 구심점은 자기입니다. 모든 세상을 자기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계산하고 움직입니다. 모든 소망과 목적도 자기 자신에게 집중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은 선이 되고, 해가 되는 것은 악으로 규정하며 살아갑니다. 자기 위에는 아무도 없으며 오직 자기가 자기의 왕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를 위해 주기를 바라고, 자기에게 굴복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자기라는 우상에 미쳐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수평적인 삶에서 그대로 안주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소위 신자라고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외칩니다. 두손을 들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면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죄란 죄는 몽땅 회개한척 하면서 하나님을 불러댑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흐뭇해합니다. 스스로도 대견스럽습니다. 기도하면서 믿음이 자란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는 자기를 바라보면서 믿음을 확인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자기 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수평적인 삶에서 매어 있는 채 하나님을 부르는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자기 열성에 도취되어서 교회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수 있는 충성스런 일군이 되도록 하는데 목적을 둡니다.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 모든 것이 교회를 위한 충성스런 일군을 배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일하면 그것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단의 종으로 전락한 모습입니다.

수평적인 삶은 사단이 인간의 마음에 집어넣은 삶의 방식입니다. 자기 중심이고, 자기가 우선이고, 자기가 왕이고, 자기를 위해서는 하나님도 뒷전으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 수평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라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크게 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은 수직적인 삶입니다. 자기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이 보이고, 자기가 구심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심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높으신 분이라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고 미약한 존재로밖에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높으신 분으로 보고 있는, 수직적인 삶에 서 있는 신자입니다.

신자가 수평적인 삶에 매여 있으면 세상이 좋게 보이고 크게 보입니다. 세상이 좋게 보이고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속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도 세상에서 상승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신분과 환경으로부터 좀더 높은 도약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크고 높으신 분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높이 도약을 한다고 해도 언제나 하나님에 비하면 백사장에 모래알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신분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다고 해도 결국 모래알입니다. 다른 모래알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모래알입니다. 똑같은 모래알이 단지 세상 것을 겹겹이 껴입은 채 착각 속에서 거들먹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하찮은 모래알로 보지 않고 거대한 바윗돌로 보기 때문에 끝없이 넓으시고 크신 하나님을 제대로 볼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중심의 삶에는 상승과 도약의 욕망만이 표출될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환경을 이용해서 그 욕망을 이루려고 할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대상을 믿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에 굴복하게 되고 그것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어집니다.

한 예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직장을 믿는 경우입니다. 직장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밀려나는 것이 더 큰 두려움으로 자리하게 되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결과입니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울 때 믿음의 본색이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평소에 하나님으로 기뻐합시다라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이 경제가 어려워지고 생활이 힘들어지자 웃음을 잃어버리고 기쁨이 상실되어 버리고 온통 경제가 회복되기만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가 동참을 해서 경제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한답시고 온 교인들을 불러놓고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구조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악이 현상화 되어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믿음이란 환경에 의해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찾았으면 환난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환경에 좋을 때 하나님으로 즐거워했으면 환경이 좋지 않을 때도 하나님으로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의 환경을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현재의 환경을 그대로 유지하고 거기에서 좀더 나아지고 싶어합니다. 현재의 삶의 환경은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데 돈은 없고, 그러니까 돈타령이나 하고 돈 없음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환경에 수입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수입에 맞춰서 자기 환경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쓸 것 다 쓰고 싶어하면서 돈 없음을 한탄한다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나사로의 모습이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부잣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면서도 믿음으로 살았던 나사로의 모습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아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수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자기의 포부가 무너질 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나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뜻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하면 흔히 하나님이 시킨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교회로 연결 지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은 교회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자입니다.

신자가 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크신 분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은 보잘것없는 미미한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자신을 미미한 존재로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높으신 분이라고 해도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0절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신자들에게는 별로 놀라움과 감동을 안겨주지 못한 말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평소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기보다는 돈을 더 필요로 하고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필요로 했고, 하나님보다 직장이 더 필요하고, 하나님보다 자식 잘되는 것이 더 필요했는데 정작 하나님은 그러한 자신의 포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10절과 같은 말씀을 들어도 시큰둥해지는 것입니다. 너를 붙들고 도와준다고 분명히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하나도 도움되는 것이 없더라'는 자신의 생각만 꽉 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했으면 틀림없이 도우십니다. 예전에도 도우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도우시고 계십니다. 다만 자기 포부를 앞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도우심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렵게 하신다면 '그속에서도 변함없이 나의 종으로 살아갈 수 있느냐?'를 묻기 위함이고, 또 그렇게 살아가도록 도우시고 붙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소원에 우리의 소원을 두고 살면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붙드심과 굳세게 하심을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자기의 소원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뇨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고 합니다. 만물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태초부터 나중까지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악으로 가득 차서 도저히 어떤 가능성도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시겠습니까? 멸망이 하나님의 불변의 계획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신자라면 세상에 악한 자들이 잘되든 떵떵거리고 살아가든 그것에 영향을 받겠습니까?

오늘날 신자들이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 이유는 세상이 제멋대로 살아도 하나님이 그냥 허용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잘사는 것이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세상에서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붙들어 주고 지켜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그러나 나의 종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붙드시는 자는 택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시고 붙드시고 굳세게 하신다고 해서 세상에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택한 자와 택하지 않은 자의 구별이 사라져 버립니다. 즉 하나님이 택한 자를 세상에서 잘살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되버린다면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잘살아 가는 사람들과 어떻게 구분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십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택한 자를 세상이 싫어하는 쪽으로 밀어 넣으심으로서 구분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싫어하는 모습으로 택한 자를 밀어 넣으셔서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는 이렇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확산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가난으로 밀어 넣으셔서 가난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종이 어떤 자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망하고 실패하는 자리로 밀어 넣으셔서 의인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이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서 세상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심판의 자리에 있음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종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무시 받고 조롱 받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을 앞세운다고 해서 기죽지 않으려고 같이 힘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돈을 들고 나오든, 지위와 계급을 들고 나오든 상관없이 신자는 믿음만 내세우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는 말씀으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교만한 자를 심판하시고자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택한 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셔서 무시 받고 조롱 받는 자리에 세우십니다. 세상이 그들을 무시하고 조롱함으로서 그들의 교만이 확실하게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낮아지는 자리로 부름 받았습니다. 14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렁이로 보고 계십니다. 지렁이 같이 취급받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나 가난하다고 무조건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오직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만 높이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높이십시오.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확신을 가지시고 낮아지는 자리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