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한 일 (사 41:21-29)

신자는 언제나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라는 것은 자신이 바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은 종교적인 활동이 왕성할수록 자신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를 판단할 때는 필히 자기 행동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왕성한 종교 활동이 의의 근거가 되어서 자기 부정이 아니라 자기 긍정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스스로 자기를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부정이 하나님을 앎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의 종교적 행동이 소극적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적 행동이 점차 활발해질 때 자기 부정에서 점차 자기 긍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긍정으로 사는 신자는 자기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고, 구원의 대상으로 못박아 놓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의심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종교 행위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우리를 활발한 종교 행위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으로 이끌어 간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결과가 열심이고 열심이 곧 신앙이라는 생각은 극히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결과는 자기 부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신앙의 길을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슬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굴러가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처럼, 죄의 본질을 가득 안고 태어난 인간이 죄로 흘러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슬려야 하기 때문에 항상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구슬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굴러가고 있다면 그것은 필히 외부적인 힘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슬이 외부의 힘으로부터 독립한 채 스스로 굴러가려고 한다면 필시 낮은 곳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잘 굴러가고 있다고 착각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언제나 자신이 외부의 힘에 붙들린 채 살아가는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에 대한 의심입니다.

신앙은 누군가에게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 41:5절부터 보면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하고 목공은 금장색을 장려하며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매질군을 장려하며 가로되 땜이 잘된다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강대국을 멸망시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한 나라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기 위한 도구로 바사왕 고레스를 사용하십니다. 2절에 보면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동방에서 일으킨 사람이 바로 바사 왕 고레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레스를 세워서 바벨론과 바벨론 주위의 강대국들을 하나하나 멸망시키십니다. 그리고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해서 바벨론을 다스리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을 귀환시키는 조서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고레스를 통해서 일하실 때 열방의 멸망을 보고 있던 나라들이 취한 행동이 5절부터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함께 모여서 각기 이웃을 도왔다고 합니다. 단합을 말합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온 국민이 연합하고 서로 담대하라고 격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믿는 우상을 더욱 단장을 하고 강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나라에 위기를 느꼈을 때 취하는 이방인들의 행동입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힘을 합하고 마음을 합해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9절에 보면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붙들고 있으니까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안과 염려는 '없음'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자기에게 힘이 될 대상이 없음에서 불안과 염려가 인간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러나 '있음'으로 나아갈 때 불안과 염려는 사라지게 됩니다. 인간은 '없음'과 '있음'의 기준을 세상에 두고 있습니다. 세상의 것이 있음으로서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으신 분을 '있음'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친히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 나라를 수치와 욕을 당할 나라로 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고 세상의 힘에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세상 마지막에 대한 말씀을 믿는다면 여러분들이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한분입니다.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4절에 "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우상을 말합니다. 우상은 장차 세상에 일어날 일도 모르고 복을 내리지도 못하고 화를 내리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택하는 것은 가증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장래 일도 모르고 장래에 우리를 살릴 수도 없는 것을 택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증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손에서 놓치기 아까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 생명을 줄 수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돈이 장래에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돈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하십니다.

장래 일은 하나님만이 아시고 복과 화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생명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점차 하나님께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신자의 당연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27절에 보면 "내가 비로소 시온에 이르기를 너희는 보라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고 하십니다.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문제는 예루살렘이 기쁜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5절에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같이 토기장이의 진흙 밟음 같이 밟을 것이니"라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일으키셔서 예루살렘을 심판해 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심판이 오기 전에 기쁜 소식 전할 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전할 기쁜 소식은 심판에서 건짐 받음에 대한 것일 것이고, 그 기쁜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아는 자일 것입니다. 기쁜 소식이란 심판 속에서 우리를 살리는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을 아는 자가 기쁜 소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이 이 기쁜 소식을 시큰둥하게 대해버립니다. 세상이 망한다고 말하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대합니다. 물론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아는 사람답게 살아갑니까? 기쁜 소식은 심판을 아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심판 속에서 건짐 받을 길을 알려주는 것이고, 그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길에 자신을 맡길 것입니다.

현대 교인이 심판에 대해서 긴장감을 가지지 않고 생명에 관심도 두지 않은채 살아가는 것은 가치 기준을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손에 돈이 쥐어지는 것이 기쁜 소식이고 기분 좋은 일이지 심판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삽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소식에 귀를 막고 오히려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심판 속에 있는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를 아는 것이 살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판을 믿지 않고 있는데 심판을 말하는 것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나는 신앙 생활을 참 잘하고 있다. 나만한 신자도 없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 '회개하라'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회개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회개하라고 한다면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도 심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짜증나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심판을 믿는 분에게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렇듯 기쁜 소식을 전하고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허망한 일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허망한 일을 자랑하고 헛된 것을 내세우는 어리석은 무리들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배당 크다고 자랑하는 것, 다 허망한 일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그들의 자랑 앞에서 기죽지 않고 언제나 말씀으로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키워서 자신에게 힘을 실으려고 하는 것도 역시 허망한 일입니다. 목사라는 직책도 역시 허망한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라는 직책, 장로라는 직책에 매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허망한 일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심판이 있을 때 세상에 남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토록 자랑하던 예배당도, 교회도, 노회도, 직장도, 가족도 다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다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교회도 사라지고 없는데 교회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돈도 사라지고 없는데 돈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그래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다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 보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었고 오늘날에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합니까?

신자들이 심판을 앞당겨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심판에 대해서 아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십시오. 세상이 다 사라질 것으로 보지 않고 하는 일은 다 허망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손에 쥐고 웃고 즐거워하는 것들은 모두 바람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남은 여생, 허망한 인생을 살지 말고 주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