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사 42:1-9)

요 17:14절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세상이 미워하는 사람들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서 어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아버지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합니다. 세상이 아버지의 말씀을 미워한다는 것을 몸소 시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었습니다. 역시 이유는 말씀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고 온 자는 모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랬고,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예수님이 보내신 신자들이 미움을 받습니다. 무엇 때문에 세상은 말씀을 그토록 싫어할까요? 말씀을 들고 온 자를 미워하고 죽여 버릴 정도로 말씀에 귀를 막고 기겁을 할까요? 그 이유는 세상은 땅에 모든 가치관을 두고 땅에서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반면 말씀은 땅에 대한 모든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땅에 대한 가치관이 무너져 버리면 세상 사람들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직 땅만 바라보면서 땅을 자신의 모든 희망으로 알고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땅과 한몸되어서 발버둥치며 살았는데 말씀이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때 순순히 무너질 인간이 있겠습니까? 땅에 대한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은 곧 자신의 자아가 무너지는 것이고, 자아가 무너지는 것은 곧 죽음과도 같은 것인데 어느 누가 말씀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인간은 말씀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반응입니다.

결국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말씀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셨다면 그 이유가 세상을 전도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겠습니까, 아니면 필연코 말씀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악함을 드러내고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후자에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것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배척할 것을 하나님이 몰랐을까요? 분명히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아들을 악한 세상으로 투입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고 전도하신다고 해도 전혀 말씀에 순종할 가망성이 없는 그런 인간들로만 가득찬 이 세상에 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세상의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도 말씀을 든 자를 이스라엘로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는 개인의 생각이나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그대로를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안겨준 말씀이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 말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을 든 자를 공격하고 배척할 만큼 귀에 거슬리고 상식에 맞지 않고 인간을 망하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한결같이 미움을 받았습니다. 어떤 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에게 말씀이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실 선지자나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입은 분들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수모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들도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하고 싶어서 고의로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욕을 먹고 수모를 당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거부가 보냄을 입은 분들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선지자들에게서 말씀을 제외시켜 버린다면 배척을 받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이 수모를 당하고 욕을 먹는 것은, 사실 선지자라고 하는 한 인간이 당하는 수모가 아니라 말씀이 수모를 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수모를 당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수모를 당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혹 말씀을 가진 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배척을 받는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배척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배척을 받습니다. 말씀에 대한 거부가 말씀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향한 거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혹 말씀으로 인해서 욕을 먹고 배척을 받는 일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자신의 고난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고난으로 보게 되면 고난을 받는 자신을 대견하게 여길 것이고, 고난받지 않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게 될 것이고, 자신의 고난받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받음이란 내가 받고 싶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자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입장입니다. 내 잘못은 전혀 없이 단지 부름을 입었을 뿐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전했을 뿐인데 말씀을 거부하는 자들로부터의 배척을 자신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나에 대한 배척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배척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종은 세상으로부터 몸소 미움 당함을 겪으면서 세상이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음을 폭로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종을 고난의 길로 집어넣은 이유는 장차 세상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까지도 미워하고 배척할 것에 대해서 미리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종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또 어떤 권세와 힘이 주어지는 것이 종이 아닙니다. 종이란 말 그대로 주인의 부름을 받아서 주인의 지시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하나님이 불러서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셨을 때,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미움을 받아도 상관없이 말씀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 여러분을 배척하고 미워하고 멀리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가지고 마음 상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배척을 받고 있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세상이 죄가운데 있다는 증거이고, 결국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단지 그 일에 쓰여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종이라고 부릅니다.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 전할 자를 보낸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기쁜 소식은 단지 들었다고 해서 기쁨이 오는 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아는 자들에게만 기쁨이 되는 소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심판 속에서 살리는 소식이기 때문에 심판을 모르는 사람은 그 말을 전한 사람을 배척하고 미워할 수밖에 없고, 심판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을 진심으로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종입니다. 즉 기쁜 소식은 심판이 있는 곳을 향해서 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기쁜 소식 전할 자를 보내신다면 결국 예루살렘을 심판의 장소로 보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소위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고 큰소리치면서 조금 착하게 보이는 일을 했다고 해서 자신만만해하는 교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이미 구원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교회 안에서 '이 교회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히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결국 말씀이 복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미리 심판에서 제외시켜 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도 여전히 죄가운데 있고 심판 속에 들어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3절에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라는 이 말씀을 보통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지 상한 갈대가 아닙니다. 상한 갈대 꺼져 가는 등불은 모두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쓸모 없고 가치 없는 상태입니다. 그것을 그냥 둔다는 것은 결국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 속에서 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의 의로 삼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가 되는 그분을 세워서 백성의 언약이 되게 하고 이방의 빛이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의가 되는 분을 따로 세우시겠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의가 전혀 없음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의가 없기 때문에 의가 되는 분을 따로 세워서 그 분을 통해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일은, 7절에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는 이것이 의가 되시는 분이 하실 일입니다.

소경의 눈을 밝히고, 옥에서 이끌어 내고,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간이란 토굴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의로 세움 받은 분이 할 일을 세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 한가지로 통일됩니다. 그것은 어둠에서 나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소경은 어둠을 사는 사람입니다. 옥에 갇힌 자도 어둠에 있는 자이고 토굴도 어둠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모두 외부에서 누군가가 구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처지로부터 구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의가 되시는 분은 의가 없어서 어둠을 사는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빼내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의를 선택해서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 오신 분이 우리를 의로 불러들이심으로 어둠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의란 인간의 착함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 의를 쌓아서 어둠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의로 오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 끌어들이시고 우리 안에 의를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을 닮은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은 나의 의가 아니라 내 안에 새롭게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의입니다. 여러분 속에 과연 이 의가 있습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서 창조하셔서 어둠을 싫어하고 빛으로 나아가고자 힘쓰는 그 의가 여러분 속에 있습니까? 의가 있다면 의로 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새롭게 의를 창조하신 하나님만 자랑하고 보여주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종으로 사는 것이고 의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 오신 그분께서 끌어 당겨서 의안에 거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것은 의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의 의를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의를 자랑하게 하고 의가 없을 때 불안하게 합니다. 신자는 의로 오셔서 우리 안에 의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지 인간의 가능성이나 인간의 착함에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미 상한 갈대이고 꺼져 가는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를 다시 멀쩡하게 만드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활활 타도록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상한갈대 꺼져 가는 등불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힘을 얻어서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한 갈대는 그대로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은 그대로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의가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대 걸 것은 새로운 의입니다. 의로 오시고 의를 창조하신 주님의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행동도 자기의 의로 삼지 않습니다. 자신은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의를 아는 자로 살아가시고 의의 흔적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