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의 사치 (사 3:16-4:1)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그 때에 썩은 냄새가 향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할 것이며 너희 장정은 칼에,너희 용사는 전란에 망할 것이며 그 성문은 슬퍼하며 곡할 것이요 시온은 황무하여 땅에 앉으리라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칭하게 하여 우리로 수치를 면케하라 하리라"

사람들은 언제나 앞날에 대한 걱정거리를 안고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시험에 붙기 위해서, 취직을 하기 위해서,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왜 시험에 붙어야 하고, 왜 취직을 해야 하고, 왜 집을 장만해야 하는지 그 이유는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단지 남이 하기 때문에 나도 해야 하고, 남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눈앞의 현실 문제에 집착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눈앞의 현실문제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왜'라는 물음은 전혀 하지도 않은 채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점에 급급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관심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믿어 왔던 신에 대한 고정관념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결국 자기의 현실문제를 도와주는 하나님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섬기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약속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자들도 현실의 문제에서 어떤 충격을 받게 되면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신앙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남편과 자식을 뒷바라지하면서 그것이 주님이 나에게 맡긴 일임을 믿고 열심히 살고 있는 한 신자가 동창들의 모임에 나가서 사회에서 일하면서 소위 자기발전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현재가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국 신자의 신앙생활이 흔들리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답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하나님을 믿으면 뭔가 나아지는 것이 있어야지 왜 항상 이 모양인가?' 이런 생각들이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이 나아지지 아니한 이상 신앙생활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보며 살 수 있는 것은 현실의 마지막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가? 내 인생의 마지막은 무엇인가?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기 전에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숨쉬는 것, 그 하나 때문입니다. 숨쉬는 것이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말을 하고, 생각도 하고, 화도 내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숨이 멈추어 버린다면 그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그 숨쉬는 것의 주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아십니까? 사람이 숨을 멈추면 그후는 무엇입니까? 신자는 숨을 멈춘 후의 때가 그 마음속에 박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현재의 나를 지배하며 현실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이 나를 지배하고 지금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이미 천국을 살고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본문을 보면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천국을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인들의 사치를 책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그대로 보면 많은 여자들에게 아주 큰 부담이 되는 말씀으로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사치하는 것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들이 지금 여자들이 다 착용하거나 사용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사치가 요새 말로 몇 백만원 또는 몇 천만원 하는 밍크 코트라든가, 몇 카럿트짜리 다이아 반지라든가, 몇 백만원 하는 핸드백이라든가, 몇 십만원 하는 손수건을 말하고 있다면 오늘 여러분은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치라고 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발목고리, 손거울, 예복, 겉옷, 목도리, 손주머니들입니다. 여기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것을 그대로 말하면 교회에 올 때는 반지도 하지말고, 목걸이도 하지 말고, 파마도 안되고, 화장도 안되고,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이러이러한 것은 사치니까 이런 사치들을 하지 말자는 캠페인이 아닌 것입니다. 사치하지 말자는 캠페인은 지금 우리나라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사치하지 말자는 것은 국력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국력을 위해서 사치하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사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치를 나무라는 것은 돈을 함부로 쓰고 비싼 것을 사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치를 책망하시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3:13-15을 보면 장로들과 방백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압제하고 그들의 포도원을 빼앗고, 짓밟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빼앗은 돈으로 무엇을 합니까? 몽땅 자기들의 쾌락을 위해서 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심판하시는데, 사치하던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고, 썩은 냄새가 행을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고, 대머리가 숱한 머리털을 대신하고, 굵은 베옷이 화려한 옷을 대신하고, 자자한 흔적이 고운 얼굴을 대신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런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흔히들 '내돈 가지고 내맘대로 쓰는데 왜 그리 말이 많느냐'고 하는데 그것이 왜 자기 돈입니까? 자기에게 있는 돈을 자기 돈이라고 여긴 것부터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야 그럴수 있다고 해도 교회 안의 사람들까지 자기에게 있는 돈을 자기의 소유로 여겨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됩니다. 은혜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빈털터리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고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뭔가 가나안 사람들과 달라서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인들과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를 근거로 해서 살아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그들의 죄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약속의 땅에서 주어진 자기들의 소유에 대해서 만족하고 남의 소유에 욕심을 내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있게 하신 가난한 자, 과부들, 고아들과는 서로 나누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탈취하고 그것으로 자기들의 쾌락을 위해서 써버렸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무시하고, 은혜와 자비를 무시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심판 받는 이유입니다. 즉 사치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리워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아는 자는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만족하지 못하고 돈을 자기의 소유로 여기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세워서 없는 자들을 무시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모르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살아갑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현실에 집착해서는 안되고 우리 주위의 없는 자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없는 자는 전혀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 먹고사는 것에만 관심 두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용서를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사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가운데 누군가와 나누면서 삽니까? 아니면 자기 문제에만 빠져서 어려운 자는 관심도 없이 삽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모습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