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상 (사 4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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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홍해를 가르신 것만이 능력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이 숨을 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며, 어둠에 갇혀 있어야 할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고 주를 의지하는 인간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능력을 능력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자가 신앙에 문제가 생기고 조그만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평소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채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기 때문에 조그만 일에도 마음이 흔들리기 일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무기력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 세끼 밥먹고 살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하루 세끼 밥먹고 사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별 것아닌 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너무 부풀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에는 하루 세끼 먹는다는 것은 별 것 아닌 것이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그때는 뭘 먹어도 굶지 않은 것만 가지고도 감사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굶지 않고 사는 것으로는 감사할 줄 모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루하루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이고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일어나게 하신 것임을 잊지 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왜 오늘 하루를 살게 하시는가를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께 헌신되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에게서 이런 감사를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숨을 쉬며 살아가고 하루 세끼 먹는 것으로 감사하기에는 우리들의 욕심이 너무 커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으로 여러분을 지키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된 자들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로 생각하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그것만을 현실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낙심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현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항상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현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 현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할 때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이사야 44장 전체가 우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 대부분은 성경에서 우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일단 안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의 문제는 부처를 안섬기고 무당을 불러다가 굿을 안하는 것으로 끝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9절에 보면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다고 말합니다. 우상은 무익한 것이고 결국 우리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냥 읽을 때에는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섬기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해보겠습니다. 우상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명이 있습니다. 우상은 죽어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상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각도 하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보시고 계십니다. 우상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상은 우리를 심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기도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과연 어떤 식으로 믿었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하나님으로 믿었습니까? 우상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했습니까 아니면 진짜 하나님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했습니까. 아마 우상을 대하듯 대한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말한 대로 우상은 보지도 못하고 생명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고 우리를 심판하지도 못합니다. 즉 우상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을 볼 수 없고 나를 심판할 수 없는 우상인데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있으시고 살아 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구원도 하시고 심판도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두려운 마음을 가졌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대한다는 증거입니다. 죽어있는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살아가는 것은 제 마음대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지도 않고 나를 심판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이 말씀과 점점 멀어지는 쪽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심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날마다 나를 보고 계시고 마지막 때 내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자기 멋대로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 당장은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 생활이 나아지고 내가 편해지는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길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눈앞의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상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상은 항상 눈앞의 일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찾지만 하나님은 나중의 일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 찾습니다. 나중일, 우리가 이 땅을 떠난 후의 일에 관심을 두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 해도 우상을 대하듯 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중 일에 대해서 언급을 하시지 눈앞의 일에 대한 해결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중은 나중 일이고 우선 급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다라고 해버린다면 결국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없고 우상만 남을 뿐입니다.

우상은 우리를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판단하십니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느냐 안섬기느냐의 문제는 부처에게 절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 행동 하나까지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살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보지도 못하고 심판도 하지 못하는 우상을 대하듯,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무시해 버리고 전혀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믿었다면 결국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신, 즉 우상을 섬기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상이라는 것은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우상의 문제가 나올 때 '나는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내가 안섬긴다고 마음먹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는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해버리면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버립니다. 내 의지에 의해서 우상을 스스로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나는 우상을 안섬기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우상을 향해 달려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상이 인간의 본성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 본성을 거스리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나는 우상을 안섬깁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상을 안섬기는 사람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신자의 감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가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우상을 안섬기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전도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 하나님,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나님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이런 모든 것이 자기가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그냥 우리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박수나 치고 있으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특징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하고 그 결과로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것을 구경이나 하면서 잘한 사람은 복으로 갚아주고, 못한 사람은 벌을 내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를 보여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라면 '내가 사랑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이 사랑하게 하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사랑하는 길로 인도하시는데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는 사라지고 하나님만 살아 계시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죽어있는 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도 힘들고 신앙생활도 힘들어 집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신으로 여겨버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하려고 하게 되고 결국 피곤하고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