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44: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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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인생이 자신이 뜻하고 예측한 대로 되어지기를 바라고 살아가지만, 세상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미리 예측한다거나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 갈 수 없습니다. 인생이란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잘되어서 웃을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전혀 원하지도 않는 일로 인해서 슬퍼하고 낙담하기도 합니다. 즉 항상 희비가 엇갈리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희비라는 것을 우리가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닥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럭비공과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럭비공은 여느 공과는 달리 둥글지가 않고 타원형입니다. 따라서 던진 사람도 그 공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습니다. 둥근 공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튀도록 미리 예측하여 던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럭비공은 공을 던진 사람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튀어 오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와 같이 어느 방향으로 튀어 오를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럭비공 같은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튈 것인가를 미리 예측해 보기 위해서 토정비결이라는 것을 보기도 하고, 자신이 예측하고 뜻하는 방향으로 인생이 튀기를 원해서 기원, 기도라는 것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가장 편안하게 살아가는 지혜는 인생이 튀는 방향에 자기를 맞추는 것입니다. 이쪽으로 튀면 튄대로, 저쪽으로 튀면 저쪽으로 튄대로 맞추어 살아가면 가장 편안한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내 뜻이라는 것이 포기되어지지 않고 항상 살아서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내 뜻과는 반대로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게 되고, 결국 내 뜻과 현재의 상황의 충돌 속에서 낙심과 절망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내 뜻대로 일이 잘될지 안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 염려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지금 당장은 일이 잘됐다 하더라도 자고 깨고 나면 어떻게 달라질 지 모르는 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일이 잘되었다고 웃고 떠들며 자기가 최고인양 우쭐거리고 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세상 다 산 것같이 낙심해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그런 모양새들이 참으로 덧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현실에 매이지 않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임을 압니다. 그래서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란 말도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란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기 마련이다는 뜻입니다.

새옹지마란 말이 나오게 된 유래는 이렇습니다. 옛날 중국 변두리에 새옹이라는 노인이 살았는데 하루는 그 노인이 기르던 말이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까운 말을 한 마리 잃어버렸다고 아쉬워 할 때 새옹이라는 노인은 전혀 아까워하는 표정도 없이 덤덤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잃어버린 말이 다시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 아주 좋은 말 한 마리를 같이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이번에는 복이 굴러 들어왔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노인만은 좋아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인의 아들이 그 좋은 말을 타고 놀다가 떨어져 다쳐서 다리 하나를 못쓰게 되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들 안됐다고 위로했지만 노인은 역시 덤덤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터집니다. 마을 청년들이 모두 전쟁터로 끌려나가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못쓰기 때문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새옹지마란 말의 유래입니다.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이 깨달은 인생의 지혜는 복이 복이 아니고 화가 화가 아니니까 복에 매이지 말고 화에도 매이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럭비공 같은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살다보면 다시 좋아질 날이 있을 것이니까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인생의 지혜는 철저하게 자기 위주입니다. 어떻게 하면 인생을 마음 편하게 살아갈 것인가를 연구하는 가운데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에도 매이지 말고 복에도 매이지 말자는 것은 옳은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매이지 않는 것이 편하게 사는 것이니까 매이지 말자라고 한다고 해서 현실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는 다릅니다. 세상을 럭비공처럼 보는 것은 같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신자는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바라봅니다. 인생이 럭비공이라는 것은 우연이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안에서 움직여진다는 의미로서 럭비공 같은 인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과 계획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앞세우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인생이 진행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역사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역사 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사 55:8절에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같지 않고 내 길은 너희의 길과 같지 않다"는 말씀이 믿어질 때에 가능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잘된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고, 못되었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현재를 보고 살아간다면 지금 눈앞의 어려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타날 영광까지 같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내뜻대로 살아지지 않을 때 비로소 내 뜻보다 더 높은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수긍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신자의 마음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라는 것이고, 내 종된 너는 내가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건망증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건망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결코 우리를 잊어버리신 적이 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인생을 인도하고 계셨는데, 정작 우리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조그만 일에도 쉽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슬퍼하고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낙심하고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얕은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아챌 수 없는 하늘의 높은 뜻이 내 인생을 지배하고 계심을 잊어버린 채 내 뜻만 앞세우면서 고집을 부렸던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지금껏 우리들이 인생 속에서 머물렀던 자리입니다.

22절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어디로 돌아오라고 하십니까? 죄를 사하시고 죄를 없이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돌아오면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를 사해 놓으시고 돌아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보면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망설이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너무 죄가 많고 나쁜 인간이어서 도저히 양심상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존심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떳떳한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큰소리 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종이라고 보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입니다. 죄를 사하시고 도말 하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곧 종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떳떳함이 없고 오직 죄사하신 하나님의 일만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전한다고 해도 자기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만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종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자기의 업적을 앞세우고 자기를 자랑하는 거짓 종들이 판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참된 종이 어떤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하실 때는 가는 그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길이기 때문에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결국 죄사함이 있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외에는 모두가 멸망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기는 하겠지만 하나님께 매이는 것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좋지만 죄사함이 있는 쪽으로는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종이 아닙니다. 종은 매이는 자입니다. 붙들린 자입니다. 자기의 계획과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 더 높은 뜻과 계획을 바라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설령 그 뜻과 계획에 의해서 자신이 엉망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뜻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세상에 한번 태어났으면 한번 멋있게 살다가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위 포부와 욕망이라는 것이 살아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모든 소원까지 다 아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우리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반대의 길로 인도해 가신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뜻을 생각하고 어리석은 얕은 내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지 않고 친히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내 뜻조차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쉴 곳은 없습니다. 어딜 가도 경쟁이고 싸움입니다. 돈이 효자고 돈이 힘이지 돈 없으면 냉대와 멸시를 받고 사는 곳이 세상입니다. 우리의 쉴곳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이고 안식처입니다. 죄사함이 있는 하나님으로 돌아가고 피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지혜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진행하고 계십니다. 인간에게 묻지도 않으시고 자문을 구하지도 않으시고 하나님 마음대로 처리하시고 진행하십니다. 24-28절을 읽어보십시오.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움직여짐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우주 만물 속에 조그만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뜻을 멈추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눈길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뭔가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껏 깨닫지 못했다면 눈길을 나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내 생각이 앞서버리고 근심과 염려에 빠져 있다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깨달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힘들때일수록 내 생각이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 진짜 죽느냐 사느냐는 고비에 처할 때가 있거든 잠시 고민과 염려를 멈추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분명히 지혜를 주시고 어려움을 이길 능력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시고 도말 하시는 일을 다 마쳐놓으시고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외침에는 관심 없이 내 인생에 몰두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이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다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으로 부름 받은 신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