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과 토기장이 (사 45:8-13)

9805061975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을 다시 세우시기 위해서 이방인인 고레스를 부르신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레스라는 한 개인에게 관심을 두고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신자에 대한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하나님이 부르셨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나 개인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관심을 가져주는 분이 직장의 높은 사람일 경우에는 승진과 좋은 보직 등 여러 가지 환상에 사로잡히면서 꿈에 부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도 나에 대한 관심으로 오해하면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도와주시고 나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으로 쉽게 말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른다고 하는 것에는 관심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망하기 위해서 부르는 것도 있고, 또는 어떤 일을 시키기 위해서 부르는 것도 있습니다. 만약 자신이 직장 상사로부터 전혀 관심을 받을만한 인물이 되지 못하고, 상사가 원하는 대로 일을 잘하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면 상사가 부른다고 할 때 무슨 생각을 먼저 하겠습니까? '내가 또 무슨 잘못을 범한 것은 아닌가?' '무슨 일을 시키려고 부르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하니까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복을 주시고 천국 보내시려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망상과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관심을 받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고, 복을 받을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살아가지도 못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행동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면,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할 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나를 불러서 무슨 일을 하시려고 하는가?'라는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아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 자세입니다.

고레스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둘만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관심을 두고 계시는 성전을 다시 세우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레스는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입장인 것입니다. 잠시 이용하기 위해서 우선 고레스가 다른 나라를 점령할 수 있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약 고레스가 이것을 안다면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입장을 바꿔 생각할 때,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잘되고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잘되어갈 때 자기 딴에는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해서 주어진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아니다 그것은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이용해서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기분 좋을리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고생을 하고 있다면, 그 고생의 대가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래의 마음입니다. 어느 인간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고생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를 불러서 어떤 일을 시키면서 나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말고 다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기쁨으로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부르셨다는 것을 내가 고레스가 되어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뭔가 모르게 불편한 심기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하면 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지 않겠는가라는 기대감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대다수의 교인들은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지켜보고 계시다가 뭔가 잘한 일이 있으면 금방 달려와서 복을 주고 잘 안되던 일을 잘되도록 바꾸어 주고 돌아가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같이 열심히 문지르면 자기를 도와주는 종이 나오는 것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는 '나를 위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가짜 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 아래 태어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를 하나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편만 되어준다면 세상 살아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교인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교회 일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설쳐대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두가 '하나님 내편 만들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편도 아니고 오직 자신 편입니다. 목사냐 평신도냐, 기도를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 헌금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 이런 것을 따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일하십니다. 교회 생활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내 편이 되어주고, 게을리 한다고 해서 내편이 안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내편이 되시도록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뭔가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시는 일만 한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편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은 '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도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하지 않으시겠다고 할 정도로 하나님은 의를 원하십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이 이 '의'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 편이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의를 드릴 수 없다면 우리는 멸망을 각오해야 합니다.

본문 8절에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 의를 비같이 부어 내리고 땅에서는 의가 움돋게 하셔서 악으로 더럽혀진 세상을 버리시고 의로 채워진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의라고는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은 내편이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의는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착한 일을 해도 의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의는 누구에게만 있습니까?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께만 의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희생을 통해서 그 의를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의가 있으신 예수님편입니다. 즉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하시고 예수님께만 관심을 두시는 것이지 결코 우리들을 중심으로 일하시거나 우리들이 먹고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하나님은 의가 없는 인간을 아주 천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의가 있으신 예수님만 높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의만 높이시고 악은 철저하게 밟고 부숴 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성경은 모두가 죄를 무너뜨리고 의를 세우는 이야기로 가득차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부르셔서 성전을 다시 세우시고자 하시는 것도 결국은 죄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심으로 죄를 물리치고 그 자리에 의를 세우시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자기의 의를 고집하고 내세움으로서 오히려 예수님의 의를 물리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멸망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는 인간의 의를 부정합니다. 십계명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십계명은 '하나님의 잣대'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면서 의가 있음을 주장할 때 십계명은 인간에게는 의가 없음을 고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교인들은 옛날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것을 자기들이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도우셔서 한다고 하고, 성령의 힘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이것은 신앙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힘으로 했다고 하면서도 모든 결과가 자기 것이 되어지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나를 얻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안락한 나의 나라를 얻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죄악임을 십자가가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렇든 자신에게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하고 진짜 십자가,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면 '그럼 인간은 뭐냐?'라는 반발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왜 지으셨고 왜 신자로 부르셨느냐?'라고 반박을 합니다. 최후까지 인간의 가치에 대해서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반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9절부터의 내용입니다.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를 비같이 내려서 깨끗한 나라를 창조하시고 더러운 세상은 멸망시켜 버리시겠다고 하니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반박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 하시려면 나보다 나쁜 사람들을 심판해야 하고, 나보다 교회에 게으른 사람들을 심판해야지 왜 나까지 심판의 무리 속에 싸잡아 넣느냐는 반발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어떤 일을 했느냐와는 상관없이 자신은 심판을 받아서는 안될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죄속에 있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는 진흙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고 나는 토기장이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의가 없는 인간은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의가 없어서 부숴 버리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이 권한 앞에서는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우린 진흙의 한 조각입니다. 부수겠다고 하시면 부서져야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숴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시고자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시고자 하시는 새로운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나에게 의가 없음을 알고 의가 되시는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좁은 길이고 고난과 고통이 있는 길이라고 해도 주님의 의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안 이상 우린 주님의 의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속에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고,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울어도 예수님 때문에 울고 웃어도 예수님 때문에 웃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 서서 의가 없는 진흙에 불과한 우리들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주님 때문에 눈물 흘리고 웃을 수 있는 신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여러분께 접근해서 여러분에게 있는 십자가의 흔적을 지워 버리려고 애를 쓴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의가 있고, 열심히만 하면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의가 없어서 십자가 지신 그 흔적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항상 나에게는 의가 없음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은 내편이 될 수 없음을 알고 내 죄를 인해서 피흘리신 예수님 때문에 눈물 흘릴 수 있는 신자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로 세상에 오신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만 따라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