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말 (사 4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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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16절부터 보면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소출이 많아서 창고에 쌓아둘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창고를 헐고 더 큰 창고를 지어서 소출을 가득히 쌓아두고 스스로 말하기를 '먹고 쓸 것이 많으니까 이제는 먹고 마시면서 즐겁게 살아가자'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생각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모아진 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세상을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립성에 대한 책망입니다.

인간의 죄는 힘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힘이 있어야 살고, 힘이 있어야 어깨를 펴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힘이 되는 일에 모든 관심을 둡니다. 이런 죄가 신을 찾는 습성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자기에게 힘이 되는 신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단의 인간 접근 방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힘 되는 것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하나님 앞에서는 힘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사실에 순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힘이 필요 없음을 아는 것은 완전한 자기 부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나'고 말씀하신 것도 예수님 앞에서는 힘이 필요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이루어야 할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은 인간이 자기의 노력과 힘을 포기하고 주님이 하신 일만 의지하는 것이라고 할 때,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뭔가 하라고 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믿음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반발하면서 자기의 자립심으로 노력과 힘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죄가운데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자립심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활동이 자신의 생존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서는 힘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결국 활동은 곧 힘을 축적하는 쪽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지혜라는 것도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쪽으로 발달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어리석게 생각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몸에 전혀 유익 되지 못하는 일에 관심 두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을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스스로의 노력과 힘으로 자기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것을 어리석게 보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의 근원은 여호와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오늘밤이라도 그 영혼을 도로 찾으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창고가 가득하다는 보이는 현실 때문에 마음이 든든해져서 창고의 모든 것이 오늘밤이라도 내 것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마음에 둔 채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까?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며 여호와의 것이라는 생각아래 모든 일을 처리하며 살아갑니까? 나에게 종말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삽니까? 가령 병이 들었을 때 병든 몸에 대해서 낙심하지 않고 '내 생명은 여호와께 있으니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힘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비록 병든 몸이라고 할지라도 편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죽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종말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질병으로 인해서 고생한다고 해도 낙심하고 신세타령하며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한쪽에 대해서는 포기할 것을 요구합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돈을 믿지 않겠습니다' '힘을 믿지 않겠습니다'는 고백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는 것, 이것이 진실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을 말하면서 자기라는 한계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현실 속에서 헤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본문 6-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전에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셔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자 바벨론은 그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이스라엘을 핍박하며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여호와를 신으로 섬기는 민족으로 점령하고 그들을 종으로 부리고 있는 만큼 여호와란 신도 자기들의 힘에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자기 힘에 도취한 채 살았습니다. 강한 힘과 평안 속에서 종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늙은이에게조차 심한 멍에를 매우며 자기들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평안이 자기 힘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한 채 살았습니다. 지금 과부가 안되고 자식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결과임을 잊어버린 채 자기 과시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방인들의 모습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오늘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 속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귀의 유혹은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신자가 구원받은 자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모든 힘을 다해서 유혹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자들은 이런 마귀의 유혹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자신의 소유를 누가 뺏어갈 때 두 눈뜨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겠습니까? 아마 자기 것을 뺏기 않기 위해서 힘으로 대항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날 때부터 마귀의 종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의로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마귀가 순순히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유혹으로 다시금 자기에게로 시선을 돌리도록 할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교회를 안나가고 기도를 안하고 성경을 안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한 대로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 힘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마귀 역시 인간을 교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힘을 포기하는 인간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되는 것을 제공하며 자기 노력과 열심과 땀이 개입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삼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마귀의 이런 의도를 잘아는 신자라면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힘써야 하겠습니까? 종교적 열심입니까? 아닙니다. 자기 힘이 포기되어지는데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자기 포기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내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생명으로 인도했음을 알고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되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 해야할 무엇인가가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살아가면 되었습니다. 먹지 말란 선악과만 안 먹으면 되었습니다. 이것은 행동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아래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로서 뭔가 해야 할 행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 아래 살아가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일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신자의 할 일이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자꾸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배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게 함으로서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가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물러갈 마귀가 아닙니다. 우리의 할 일은 내 배후에서 내 생명을 주장하시고 인생을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신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일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쉬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교만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잊지 않기 위해서 성경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은 자기 포기를 바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가 있고, 자기 경험과 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포기라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앞의 자기 소유와 지식과 경험을 앞세울 때는 그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무리들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다르게 살라고 뽑힌 자들입니다. 그들이 다르게 살아야 하는 것은 자기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앞세우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든 것이 평안하고 잘될 때 이제는 우리 힘으로도 살 수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자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했습니다. 바벨론 역시 자기의 힘과 지혜와 지식을 앞세우며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8,10)라고 하면서 교만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모두는 인간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종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7절에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주모가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 종말도 생각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종말이 있습니다. 이 종말을 잊어버리고 살 때 자기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해 줄 세상 것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보고 살아가십니까? 믿는다는 말은 수없이 많이 하면서도 돌아서면 결국 내 뜻대로 살아가고 내 지혜와 지식과 경험을 앞세우는 우리 자신의 삶의 잘못됨에 대해서 깊은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아무 것도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질 그 날이 되면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때문에 종말을 마음에 둔 채 살아가는 신자는 결코 그리스도의 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생이 조금 편치 못하고 힘들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 것이 헛된 것으로 보여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