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위하여 (사 4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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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살아있는 신입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인간의 계획과 뜻에 따라서 움직여 주는 허수아비 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움직여 나가시는 신실하신 여호와십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에 대한 판단까지도 인간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심으로서 인간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현대 인간이 상상하는 신에 대한 개념은 종교적 인간의 신지식에서 나온 산물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지금 신지식이라는 자기 상자에 하나님을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기 상자에 맞지 않는 부분은 잘라내 버리고, 또는 억지로 맞춰가면서 자기의 하나님을 만들려고 기를 씁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살아 계시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인간의 타락상에 불과합니다. 종교적 인간의 신지식으로 하나님을 마음대로 상상하며 인간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을 가지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은 음란 비디오를 보거나 음란 만화를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하고 음란하다고 할 때 그 기준은 십자가이지 음란한 만화나 비디오가 아닙니다. 때문에 음란 비디오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음란 비디오를 본 사람보다 깨끗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보지 않거나 보거나 그 마음속에 음란한 생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 12:39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즉 요나의 표적은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신지식은 이미 하나님을 인간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착하고 열심히 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상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인간이 착하게 생각하고 의롭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죄'라는 말 한마디로 현 세상을 판단해 버립니다. 따라서 인간의 신지식은 여기에 거부하게 되고 결국 죄를 얘기하는 자에 대한 핍박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 속에서 발생하는 십자가이고, 지금도 역시 요나의 표적만 얘기하는 것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을 볼 때 악하고 음란한 시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속의 교회 역시 '십자가 지신 주님만 사랑합시다'는 말을 싫어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우기면서 교회를 사랑하지 말고 주님만 사랑하자는 사람을 향해서 압박을 가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면 그곳이 곧 교회입니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회란 목사가 있고, 예배당이 있고, 십자가가 붙어 있고, 성가대가 있으며, 많은 조직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교회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목사 없는 교회, 예배당 없고 아무 조직도 없고 아무 일도 안하는 교회를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세 사람만 모여서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내 이름으로 모이면, 즉 주님의 십자가만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모인다면 그곳이 교회 되는 것을 거부해 버립니다. 왜냐하면 내 소유로서의 교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악하고 음란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종교적 인간의 신지식에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신 성경의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앎이 아니라면 우린 스스로에게 속아서 헛된 인생 길을 걸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9절에 보면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11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구절을 볼 때 현대 종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인간의 신지식에서 나온 하나님은 인간을 돕고 인간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참고 인내하시고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멸절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9,11절을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의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서 일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 스스로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지금 교회들은 자기들이 뭔가 열심히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고 복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교회 편도 아니고 목사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편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도,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일에 이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귀에 거슬려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선택했다는 말이 듣기 싫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이용당한다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계획을 세우고 인간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멋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지 이용당하는 도구라고 할 때 인간의 자존심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다만 하나님이 쓰시는 일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나를 충분히 이용하실 수 있도록 나를 맡기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태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나서서 '하나님이 이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줄로 믿습니다. 내가 이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우리를 이용하시는 하나님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다같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불렀습니까? 1,2절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고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라고 칭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 이름으로 맹세하고 하나님을 부르는 그들을 4절에 보면 완악하고 목의 힘줄은 무쇠요 이마는 놋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완악함으로 뭉쳐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완악함을 부숴 버리고 진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6절에서의 새 일이라는 것도 인간의 완악함을 부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줄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내가 아파도 괜찮고 무시당해도 괜찮고 욕먹어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바로 이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버린 분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린 단지 내가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그 마음이 있으면 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뭔가를 할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 편에서 여러분의 가정에 무슨 일이 있도록 해서 하나님의 일에 이용하실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사건을 통해서 이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때 그 일에 순종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이 일도 하지 못하면서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설치겠습니까?

때문에 목사가 교회에서 참된 신자를 찾기 위해서는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을 볼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웃으며 살아가는 분이 누군가를 보면 됩니다. 비록 어려움으로 둘러 쌓여 있지만, 한숨과 염려로 지새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고 주님 보시기에 최고의 미음의 소유자입니다. 은석교회에 이런 분이 보이시거든 고개를 숙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십시오. 그분이야말로 은석교회의 진짜 목사입니다.

교회는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모여야 합니다. 서로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내세우면 내 하나님을 자랑하게 됩니다. 돈을 벌게 하고, 자식 잘되게 한 내 하나님을 자랑할 때 결국 경쟁과 자랑만 있는 가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이득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일에 쓰여질 때 기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낮은 자리로 쳐박힌다 할지라도 그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만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자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