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시간에는 여인들의 사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치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용어들을 세상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의미를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의 용어들은 그 용어가 쓰이게 된 성경을 배경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배워오고 알아왔던 세상적인 상식을 버리지 못한 채 성경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들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될 것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사치를 말할 때도 단지 세상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면 돈 많이 쓰고, 호화롭게 사는 것을 사치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런 경우 사치의 기준을 정하기가 매우 애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얼마이상 쓰면 사치다’는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소비를 사치라고 말하지만 과소비란 자신의 소득을 넘어서는 소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한 달에 몇 천만 원 버는 사람과 백만 원 버는 사람의 소비를 생각할 때 그 역시 뭔가 모순이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사치하지 말자는 것을 단지 검소하게 아끼며 사는 것으로만 강조한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도덕에 불과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치란 어떤 의미입니까? 지난 시간에 사치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리는 행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치란 가난한 자들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무시하면서 자기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 47: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치하는 자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자기 주위에 어려움을 당한 이웃이 있는데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웃의 어려움을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는 과부가 아니라 하여 과부의 심정을 외면하고 과부 앞에서 남편 자랑하는 것이나,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 앞에서 아이 자랑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어려움,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서 사는 것을 사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얼마를 쓰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사정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니까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도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모든 기회를 놓쳐버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치를 책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는 삶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심판해 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 속에 뭔가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은 여호와의 싹입니다. 2절에서 말하는 그 날이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해 버리시는 날을 말합니다. 그 심판의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자비를 알지 못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압제했던 자들을 흩어버리시고 다시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모으시는 자는 세상에 가진 것이 없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했던 자들입니다. 이들이 곧 여호와의 싹이며 남아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재주 있고 실력 있는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사는 자들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이 남아 있는 자들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남아 있는 자들은 시온에 있으며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이 무엇을 가리키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남아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중에서 정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일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데 그 일은 더러움을 씻으시며 정결케 하는 일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예루살렘은 장소적인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루살렘을 장소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모두 짐 싸들고 이스라엘로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만 더러움을 씻음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움을 씻음을 받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어디입니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이 거룩하다 칭함을 받은 것은 심판하는 영, 소멸하는 영, 즉 성령을 통해서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곧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그것이 곧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자신의 죄를 알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나아온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죄 씻음 받는다고 하는데 이 말은 성령이 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소멸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죄 씻음이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성령을 통해서 내가 죽을 죄인임을 아는 것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나의 죄를 책망하고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신자는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남아 있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사는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우리를 대신해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고 달려가는 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으며 살아도 그 마음은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자들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이들이 남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런 신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낮추시고 하나님만 바라는 신자 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일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힘든 일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남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