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임무 (사 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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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육으로 난 사람과 영으로 난 사람, 이렇게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구분을 편하게 신자와 불신자로 생각합니다. 즉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라고 하는 단체의 가입 여부로서 육과 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이란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구조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틀과 구조를 그대로 지닌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죄인의 인간 구조를 벗은 채 살아갑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생각과 하늘의 틀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육으로 난 인간의 존재 의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에게 모든 의미를 두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마음의 소원에 의해서 모든 행동이 연출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으로 난 인간입니다.

육으로 난 인간과 영으로 난 인간은 행동에 의해서 구분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인간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특별한 행함으로서 구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의 행위는 모두가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면 아무리 고상하고 거룩한 행위를 나타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의 모습은 아니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회의 관습에 의해서 종교생활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특별한 행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행동을 스스로 이룩해내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얼굴에는 항상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고 하고, 말도 고상하고 점잖은 말을 골라서 하려고 하고, 화가 나도 억지로 참으면서 웃음을 띄우는 그런 행동을 연출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고, 사람들로부터는 뭔가 다르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인품이나 성격, 얼굴 표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느냐가 하나님의 관심일 뿐입니다. 평소에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면서 자기의 현재의 처지와 환경에 대해서 감사하고 은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일에 대한 감사와 은혜가 아니라 나쁜 일이 있을 때에도 감사와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으로 난자와의 차이점입니다.

육으로 난 자는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 때문에 감사합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원망합니다. 슬픈 일이 있으면 울면서 슬픈 일에 빠진 그런 일에 자기에게 발생한 것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그러나 영으로 난 자는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좋은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은 나쁜 일이 주어질 때 증명됩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비록 눈물은 나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슬픈 일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합니다. 그리고 슬픈 일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아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슬픈 일이 극복되어집니다. 즉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기의 현 처지를 비관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은혜를 발견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영으로 난 사람의 특징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단순한 윤리나 도덕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은 자신의 현재 처지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환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을 뜻합니다.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 욕망과 포부를 이루는 것이 커다란 목표이고 삶의 목적이겠지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신자라고 할 것 같으면 자기 포부가 앞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어떠한 존재이며,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주님께서 어떤 고초와 희생을 치러야 했던가를 자기 마음속에 더 크게 부각시키며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보내심 받은 환경과 처지는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악조건이었습니다. 그 악조건 속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만 앞세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자꾸 자신에게 큰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세상에 보냄 받은 의미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는 데 모든 힘을 낭비하는 육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곧 사라질 안개 같은 것이고 흙으로 돌아갈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높고 귀한 신분으로 세상으로 살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산다고 해도 그 기간은 70, 80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뜻에 의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보냄 받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데 모든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영으로 난 사람이고 그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이 곧 여호와의 종입니다.

오늘 본문에 '종'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3절에 보면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킨 대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종은 오직 여호와가 시킨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종이란 누구 눈치를 보며 누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누구의 종인가가 드러납니다. 만약 인간의 눈치를 보고 인간이 시킨 대로 움직인다면 그는 인간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목사의 눈치를 보며 목사가 시킨 대로 움직인다면 그는 목사의 종입니다. 목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살지만 장로 눈치보고, 교인들 눈치 보면서 목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에만 급급하다면 그는 인간의 종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말을 아무런 생각 없이 쉽게 내뱉습니다. 목사들이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많이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종을 잘 대접하라고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서 하나님께 쓰인 사람들이 어떤 처지와 환경 속에서 살다가 죽었는지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과연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여호와의 종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까? 이사야는 냉대와 배척을 받았을 뿐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드러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백성들의 분노 속에 멸시와 배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종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대우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배경을 이용해서 종으로서의 특권을 누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여호와의 종은 존귀함을 받기보다는 멸시받기 십상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가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기분 상하게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멸시를 받고 배척을 받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중단할 수 없습니다. 주인의 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헛된 일처럼 보인다고 해도 계속 전해야 합니다. 4절에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도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말씀을 전한다고 할 때 가지는 바램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하고 내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대해서 배척을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데도 계속 전해야 하나?'라는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결론은 그래도 전해라는 것입니다. 종은 전할뿐입니다. 내 말을 받아준다 받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100번 전했는데 100번 욕먹고 배척을 받는다고 해도 전해야 합니다. 종은 전할뿐이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결과는 여호와의 손에 있기 때문에 종은 단지 전할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과까지 여러분의 손으로 이루어 보려는 유혹을 버려야 합니다.

7절에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스라엘에 속한 자로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7절에 나온 대로 멸시를 당하는 자, 미움을 받는 자, 종이된 자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종이 이스라엘 속에서 찾은 것은 하나님이 택한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닌 자였습니다. 여호와의 종은 자기가 보기에 좋은 사람,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닌 자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약자의 모습입니다. 멸시와 미움을 당하고 종된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그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들과 함께 약자로 대우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약자들, 병들고 가난하고 죄인으로 멸시받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심으로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예수님도 함께 멸시받고 배척받은 것 같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이 어떤 속성을 지닌 사람을 모아서 구속하시는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하나님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람, 즉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고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종이라고 인정하지 마시고 그 사람이 누구를 찾기 위해서 목사의 자리에 있는가를 살피셔야 합니다. 참된 이스라엘에 속한 자는 약자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누가 약자로 살아가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강자를 찾고 강자에게 가까이 하려는 것은 자신 역시 세상에서 강자로 남고 싶어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목사라하나 여호와의 종이 아니고 사단의 종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1절에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미의 복중에서부터 부르셨습니다. 이유는 세상에서 존귀함을 얻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종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종은 주인에게 받은 임무가 있습니다. 참된 이스라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부터 세상으로부터 벗어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약자를 찾기 위해서는 부름 받은 사람부터 약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종은 복음을 이용해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습니다.

2절에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여호와의 종의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종을 화살로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칼은 자르는 것이고 화살은 쏘는 것입니다. 결국 종은 세상을 쏘기 위해서, 그 입은 세상을 자르기 위해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담 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을 자르고 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멸시와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세상을 쏠 때 세상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자를 찾는 자는 함께 약자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내가 이 땅에 보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여호와의 종입니다.

세상과 합류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강자를 좋아하고 강자 되고자 하는 세상에서 함께 강자 되기 위해서 강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부름 받은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복중에서 부르신 것은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이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이스라엘을 찾는 것, 이 일을 잊지 마십시오. 찾기 위해서 전도하고 돌아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가 보냄 받은 자리입니다. 보냄 받은 자리에서 보냄 받은 종의 할 일을 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