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우시는 여호와 (사 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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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속는다거나 믿었다가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입니다. 상대방의 표정이나 눈을 보고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이고 대충이지 깊은 속까지 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인간관계는 행위를 기준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를 통해서 마음을 짐작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라는 것은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고 흉내낼 수 있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위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위선 또는 가식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행동으로 판단할 수밖에는 없지만 단 하나 신앙만큼은 행위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행위는 어느 누구라도 모방할 수 있고 꾸밀 수가 있습니다. 만약 행위로서 신앙을 판단한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앙이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마 목사일 것입니다. 항상 성경책을 가까이 하고 있고, 새벽마다 기도하고, 인자하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을 대하는 목사들을 보고 누가 감히 신앙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장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목사의 이러한 행위를 과연 다른 사람들이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입니까? 충분히 흉내내고 꾸밀 수가 있습니다. 사기꾼도 얼마든지 목사처럼 흉내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교회의 목사는 목사를 가장한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현 교회의 잘못은 신앙의 기준을 행위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목사가 신앙적 행위와 비신앙적 행위를 구분하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인들을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목사가 신앙적 행위와 비신앙적 행위를 구분하여 가르침으로서 교인들은 신앙적 행위는 부지런히 행하고, 비신앙적 행위는 삼가함으로서 스스로 신자되려고 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의 대다수가 모양만 목사이고 모양만 신자인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되버립니다. 행위란 얼마든지 모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신자는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마음의 법이 되어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기 때문에 어떤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하면서 자신이 잘못되어 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이 마음의 법이 되어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는 잘못이라고 느끼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것은 하지 마세요'라고 해버리면 교회 안에서의 자기 체면과 위신 그리고 신자답다는 칭찬을 기대하는 욕심 등이 작용해서 의도적으로 행동을 자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안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잘못된 행동을 안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이 법이 되어 산다는 것이 기쁘신 것입니다. 뭔가 잘못된 일을 하면 '이렇게 해서는 하나님께 기쁨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사는 자들이 택함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돌아올 자인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 보낸 이혼서가 어디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고 합니다. 구원은 어딘가로부터 빼내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빼내주는 곳이 어디냐면 우리가 팔려있던 세력으로부터입니다.

저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다같이 죄에 팔린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절에서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라고 한 말같이 하나님이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죄에 팔려 있었기 때문에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죄에 팔려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다시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팔린 경험이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A란 사람에게 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개가 B란 사람이 주는 음식이 너무 맛이 있어서 그 사람의 집으로 가버립니다. 주인이 판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맛있는 음식에 빠져서 주인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1절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A라는 주인이 와서 아무리 개이름을 불러도 이미 맛있는 음식에 빠진 개는 주인의 음성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 개를 원래 주인의 집으로 돌려놓게 하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택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B란 사람의 개중에서 골라서 끄집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A란 사람의 것이었는데 맛있는 것에 팔려간 개를 가리켜서 선택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는데 죄에 팔려서 마귀에게 붙들린 자를 하나님이 누군가를 보내셔서 그 음성을 듣고 따라오는 사람을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그분이 우리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 값을 치렀는데 그것이 곧 자기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진짜 신자인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택한 자는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계신 자리로 돌아가면서 '이것은 내 의지로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결과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끌어당길 때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스스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결코 선택받은 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신 결과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교회에 오는 것까지도 자기 믿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우린 오히려 죄를 따라가는 자입니다. 항상 죄에 팔려 가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한번 하나님을 믿었다고 해서 앞으로는 죄에 팔려가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죄는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합니다. 문앞에 엎드려서 기다리는 것이 죄입니다. 우린 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교회에 온다면 그것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에 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내 몸을 위해서 죄와 타협하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4,5절에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귀를 깨우치시고 열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런 자신의 처지를 바르게 아는 사람 같으면 과연 '내가 교회 왔고' '내가 기도했고' '내가 성경 봤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내가 했다'고 하는 사람은, 죄에 팔린 자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값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일을 모른 사람이기 때문에 택한 자가 아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는 죄에 팔려 있던 자기의 처지를 압니다. 그리고 주님이 찾아오셔서 자기 생명으로 값을 치르고 그 자리에서 빼내주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 것을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신자는 자신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아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또 다시 죄에 팔린다고 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죄에 팔리는 자이면서도 오늘 이렇게 교회로 모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무나 끌어 모아서 교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온 자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나온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몸을 위해 처세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 처세술로 살아갑니다. 아이들까지도 처세를 합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뭔가 부탁을 할 때 아양을 떨고 애교를 부립니다. 그것도 처세술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처세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처세술은 꼭 필요합니다. 신자 역시 처세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삽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까지 처세술을 발휘합니다. 교회에서 자기 자리를 든든히 하기 위해서 목사에게 잘보이려 하고 교인들에게 인심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런 모든 것이 처세술입니다. 처세술은 자기 방어의 기술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신자에게 이런 처세술이 필요한 것입니까?

6절을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과연 처세술이 필요했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방어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지키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때리면 맞고 침뱉으면 얼굴을 피하지 않고 욕하고 욕먹겠다고 하신 예수님께 처세술은 필요치 않았습니다. 결국 오늘날 신자들이 처세술을 내민다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뒤를 따라갈 때 자기를 방어하면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앞서 가시면서 우리에게 날아오는 돌과 욕과 침을 대신 받고 막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역시 주님이 당하신 것을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음성을 깨달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7절에 주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도우심은 우리로 하여금 수치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게 해주시는 도움입니다.

하나님께 눈에 열리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처세술로 세상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린 사람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주님께 맡기고 삽니다. 죄에 팔린 나를 빼내시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값으로 치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그 은혜만 자랑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여러분을 담대하게 할 것이고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어려움에도 두렵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