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아는 자 (사 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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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사람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특히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 대한 실수와 잘못은 위신과 체면에 대한 손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중시한 나머지 '어쩔 수 없었다' '본의가 아니었다'는 등등의 말로서 그 책임을 조금이나마 벗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습성은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보여집니다. 즉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오는 불안감과 낙심이라는 심리적인 압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충실하지 못한 책임을 주위 환경이나 인물 등 여러 가지 여건이 부실한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돈만 많으면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을 텐데' '자식 걱정만 없으면 열심히 해 볼텐데'하면서 마치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원인이 모두 외부 환경에 있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왜 이런 풍조나 습성이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앙이라는 것까지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데 대해서 하나님께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체면 손상을 염두에 두고, 혹 징벌로 인해서 가정이나 개인의 문제에 불이익이 올 것에 대한 걱정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이 안되고 있는 사람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라면 항상 주님께서 죽으신 십자가의 현장 앞에서 자신의 탐욕을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의 탐욕 때문이지 결코 주위 환경이나 여건 때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것이 환경 때문이 아니라 탐욕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아무리 나쁜 환경과 상황 속에 처한다 할지라도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대해서 불평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이런 환경을 내 앞에 두셨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자기 탐욕으로만 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환경의 개선에만 관심을 두게 될 것이고 결국 땅에서 천국을 버리고 사는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내용 중에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를 보면 예수님은 신자가 고생스런 세상을 빨리 떠나서 편한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고생을 하지 않고 사느냐에 있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신자가 악에 빠지지 않고 보전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인데, 이 말을 악을 행하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인간은 이미 악 속에 살아갑니다.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움직이는 것, 모든 것을 악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악이 있음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편에서 자기 속에 있는 악에 대한 인식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속에 악이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내 밖에 악이 있게 하십니다. 즉 내 밖의 악을 통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이 내 속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서로 비교함으로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내 속에 악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기가 쉽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역시 자기의 악에 대해서 무감각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속의 악이 꿈틀거리고 그 정체를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밖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여러 가지 여건들을 만들어 놓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걱정 근심으로 가득한 채 평소의 신앙 생활에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즉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기 전부터 하나님만 믿었던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것만 골라서 믿었다는 것이 들통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지 않고 사는 것이 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소 이런 악이 내 속에 있음에 대해서 소홀히 하고 살아갑니다. 내 딴에는 열심히 교회 다니고, 성경도 많이 알고 있고, 선한 일도 많이 하면서 '나는 믿음이 있다'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착각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깨어지고 믿음 없음이 발각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아이가 아파서 수술비 100만원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때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돈 100만원일 것입니다. 100만원이 없어서 아이가 죽을 수도 있는 판국에 '나는 하나님만 믿는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결국 '수술비 100만원을 주실 것을 믿는다'는 식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사는 신자였더라면 그러한 일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었구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만 돈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도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을 의지하고 살았음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악이 드러나게 할 사건이 없으면 계속해서 믿음의 환상과 착각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결국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악에 속해 있는 실체에 대해서 깨닫게 해달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나의 악을 발견하는 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왕 악에 속해 있으니까 마음놓고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도 인생 속에서 세상을 의지하게 되는 상황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이 바로 나의 악의 실체이고 나의 본모습임을 깨닫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죄에 팔린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보내서 그 생명을 값으로 주고 우리를 악에서 빼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악에서 빼냈다는 것은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악의 영향력, 즉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주님으로 인해서 생명의 세력 안에서 살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죄에 팔린자였음을 발견하고 오직 주님께만 모든 희망을 걸고 사는 자들을 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신다면 의인의 자리에서 찾으실 것으로 오해합니다. 무엇 때문에 더러운 죄인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기 백성을 찾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죄인의 자리에 있습니다. '나는 죄에 팔린자입니다'라는 죄인의 자리에서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놓으신 그분만 의지하는 분이 참 신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악을 깨닫고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하는 길로 인생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의 환경과 처지를 생각하면서 한숨짓고 원망하는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희망을 둔다는 뜻입니다. 내가 죄에 팔린자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에게 의가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의에 생명의 희망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여호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습니다. 자기에게서는 생명의 근거가 되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자기에게는 의 없음을 알고 의를 좇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만을 기억합니다'라는 말로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때 그 진실성의 여부는 '자기 행위에 의 없음을 아는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어떤 행위도, 그것이 거룩하게 보이는 종교적인 행위라고 할지라도 결코 의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자랑하지 않을 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마음에 두고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의가 내 생명임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주님의 의를 생명으로 영접했다면 자동적으로 내 안에 있는 내 의는 밀려나고 사라져야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는 말씀도 내가 건짐 받은 자리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의 자리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자리에서 건짐 받은 것이 아니라 추하고 더러운 자리에서, 추하고 더러운 자로 살다가 건짐 받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의를 알고 의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가 죄에 팔린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자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죄속에 살면서도 하나님이 보내신 그분의 의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부담을 느끼고 신앙생활에 부담을 가지는 것입니까? 신자가 신앙에 부담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이 되는 일을 해야 신자답다는 생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선을 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이며 의를 알고 의를 좇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부어주기 위해서 일하고 계심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스스로 짐을 지면서 살게 됩니다.

의가 우리의 생명임을 아십니까? 우리 속에 외부에서 의가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로운 자로 여김 받고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초청되었음을 아십니까? 이것을 아신다면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주어진 의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의가 나를 주장하기를 구하면서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마음이 흔들리고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서 일하시는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언제나 의를 바라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죄에 팔린자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악의 정체를 발견하게 하시고 의없는 자였음을 날마다 깨닫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과 고생의 자리로 밀어붙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의를 알고 의를 좇는 사람은 세상의 것이 하찮게 보여집니다. 영생이 가장 귀함을 발견한 사람에게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 하찮게 보여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영생을 말하면서 영생의 가치에 대해서는 도외시해 버리기 때문에 우선 당장 필요한 세상 것들을 더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주어지지 않거나 나에게서 사라지는 사건들이 있을 때 흔들리고 낙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3절에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황폐한 곳을 위로하시는데 광야를 에덴으로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으로 만들어서 위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를 에덴 같이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같이 하십니다. 광야를 살면서 에덴을 사는 것처럼 하시고 사막을 걸어가면서 여호와의 동산을 걸어가는 것처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이 위로는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결국 우리가 세상에서 위로는 얻지 못하고 산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마음에 두지 않고 내 탐욕과 야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4-6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가 세상에 퍼지고 그 의가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의를 알고 의를 좇았던 자들만이 생명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과연 나는 의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가?'입니다. 하나님은 의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내 인생을 때로 힘들게도 하셨고 어렵게도 만드셨는데 나는 의를 알게 되는 것보다는 내 생활이 편해지는 것에만 마음두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나의 악의 정체였음을 깨닫고 다시금 의가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의에 다스림 받고 살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2절에서 혈혈단신으로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서 창성케 하셨다는 것도 하나님의 의를 알게 하시고 그 의를 널리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내가 죄인임을 알 때 은혜를 기억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 때 은혜로 받고 은혜로 바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자신에게 뭐가 있고 없고가 그렇게 큰 문젯거리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의를 아는 자의 평안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7절 말씀처럼 그 누구의 비방도 훼방도 어떤 환경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