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운 마음 (사 5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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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양식이 핍절하지도 아니하리라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

사람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단순치 못하고 아주 복잡 미묘해서 자기의 마음조차도 자신이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음은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사랑, 탐욕, 두려움 등등 여러 가지의 감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이란 그 여러 가지의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보통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은데 그것은 큰 실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만큼 죄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죄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습니다. 가령 구약에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렇게 행동에 대한 규제를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미움도 살인이라고 하시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시면서 마음까지도 죄로 규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행동에 대한 자제만 하면 죄에 대해서 자유로울 줄 알았던 사람들은 마음을 규제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결국 죄로부터 영원토록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의 본질을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마음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행동은 스스로 자제할 수 있고 자신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움직여질 수 있지만 마음만큼은 인간의 규제를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악의 무서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무서운 죄의 심각성을 도외시 해버리고 마음에 자기를 맡긴 채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조그마한 윤리적 도덕적인 흔적을 발견함으로서 아직 신자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자신을 확인하고 죄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안도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죄는 곧 내 속에 있음을 잊어버리는 큰 실수입니다.

인간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이상 죄의 영향력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을 정복하고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이상 인간은 그 누구도 죄를 이기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애당초 인간의 마음에는 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인간의 마음은 이처럼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단순한 마음이었습니다. 미움도 몰랐고 시기도 몰랐고 탐욕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인간은 '나'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나'를 알고부터는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움을 알게 되었고 질투 분노 등등 현 인간적 감정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인간적 감정들은 모두가 '나'를 중심으로 해서 발생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것 하나 '나'와 관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인간의 마음에서 '두려움'이란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두려움은 태초의 인간들은 당연히 알지 못했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한 후 두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맨처음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집니다. 창 3:10절에 보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기가 두려워서 숨었다라고 간단히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복잡미묘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찾으실 때 숨어버린 아담의 두려움도 복잡 미묘한 마음에 따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왜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까? 창 3:10절에서는 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말합니다. 즉 두려움의 동기는 자신이 벗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간이 벗고 있던 것은 창조될 때부터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자신의 벗었음에 대해서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후 맨처음의 반응은 자신이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벗었음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진 것은 자신의 실체가 노출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고,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해 입은 것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행동입니다. 즉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최초로 보인 행동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부끄러운 일을 한 것에 대한 인간의 마음이고 숨어버린 것은 하나님의 추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행동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두려움을 가질 때는 뭔가 신자답지 못하다는 일을 했을 때입니다. 즉 신자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의 징벌을 생각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아니라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에서의 두려움입니다. 결국 두려움이라는 것도 '나'라는 존재를 중심으로 발생되어지는 죄의 흔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두려움의 대상은 필히 자신보다 힘이 강한 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지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결국 두려움은 힘에 대한 인간의 굴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린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자는 힘의 세상에 살면서 힘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먼저 9절에 보면 '용'이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용은 지금까지 실제로 보지 못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상하는 용은 하나같이 강하고 용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용은 곧 영웅을 상징합니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용'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용과 같은 자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약자는 강자에 의해서 굴복 당하고 다스림 받고 살아가야 합니다. 약자는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강자에게 굴복하고 아부해야 합니다.

강한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용을 주가 찌르고 용에게 붙들려 있는 택한 백성을 건져내시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신자가 주님을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주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음이 있게 하시고 주님을 알게 하셔서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교회로 나오게 하시고 믿음이 있게 하시고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신자되게 하신 그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는 우리를 붙들고 있던 용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용과의 전쟁에서 용을 찌르시고 승리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여호와의 전쟁'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전리품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곧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배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과 용의 전쟁, 즉 '여호와의 전쟁'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은 용의 손아귀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는 운명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이 용과 싸우시고 용을 찌르시므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용은 힘의 존재입니다. 인간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주고 힘에 대해서 탐욕을 갖게 하고 힘을 원하며 살게 합니다. 서로가 힘을 원하다보니 인간세계는 싸움과 미움과 시기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속에서 구원받은 신자라면 일단 힘의 세상에서 빠져나온 것이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여전히 힘을 소유하기를 원하면서 힘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을 과연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 수 있고, 여호와 전쟁의 전리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2절에 "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 심판 속에서 택한 자를 건지시기 위해서 하신 일, 이 모든 일들이 신자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지 결코 세상 것이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위로로 삼고 있습니까? 혹 세상 것을 위로로 삼는 것은 아닙니까? 돈이 있어야 안심하고 자식이 잘돼야 고생한 것에 대한 위로가 되고 성공한 것이 보람이고 착한 남편이 든든한 힘이라면 신자의 위로가 되시는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모르고 죽을 사람들 풀같이 될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즉 힘 가진 자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잊고 살아가는 삶의 결과입니다. 15절에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고 바다의 물결까지도 마음대로 흉용케 할 수 있는 분이신데, 왜 그 이름을 잊어버리고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13절에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자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있느냐"고 하십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세상을 움직이시는 여호와는 왜 잊어버리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고 죽을 인생에 지나지 않는 인간을 두려워하다 것입니다.

신자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고 택하신 자가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하신 일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에서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 성공한 인생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힘을 가진 자로 사느냐보다는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여주는 신자로 살아가느냐에 더 충실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세상을 두려워하고 힘있는 자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이 과연 만군의 여호와를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신자로서 당당하지 못하고 힘과 권세 앞에서 두려움을 나타낸다면 그순간 만군의 여호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죽을 인간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죽이시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강한 힘이 압제할 수 있는 것은 몸이지 영혼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보다는 영혼에 더 마음을 두고 산다면 힘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아직까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고, 힘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린 두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힘과 권세를 가진 자에 대해서는 굴복하고 엎드리고 아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에 두려운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잊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목사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지지 마십시오. 목사 역시 죽어야 할 인간이고 풀 같은 존재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가에 대한 걱정, 돈에 대한 걱정, 경제에 대한 걱정, 이러한 모든 것이 결국은 힘을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임을 아십시오. 힘이 되는 세상 것이 자기에게서 사라지고 줄어들수록 두려움을 느끼고 걱정하는 것은 힘으로 사는 세상에 갇혀 있는 인간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이제 우리들 속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으로 인해서 주님의 일을 막아 버립니다. 주님은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데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의 따돌림을 두려워한 나머지 복음을 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속에 주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두려워하십니까? 신자는 내 속의 예수님을 마음껏 드러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눈치를 보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마음놓고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 뭔가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있을 때 내가 여호와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하면서 두려움이 없는 신자로서 마음껏 주님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가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