깰지어다 (사 51: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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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하였도다 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너의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당하였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랴 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네 주 여호와, 그 백성을 신원하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곤고케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찌기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의 앞에 네가 네 허리를 펴서 땅 같게, 거리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본문 17절에 보면 '예루살렘아 깰지어다 깰지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깰지어다'는 말은 한마디로 '정신차려라'는 의미를 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 한마디로 이스라엘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오늘 우리에게 외쳐지고 있는 말씀임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깰지어다는 말은 잠자고 있는 상태의 사람에게 하는 말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에게 '깰지어다'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잠자는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곳에 가셔서 기도하실 때 같이 간 제자였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마 26:28)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의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과 같은 관심을 제자들도 가지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겟세마네는 단지 예수님을 따라온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있는 것을 나무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란 예수님의 마음에 일치되는 기도가 진짜 기도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이 예수님의 마음과 전혀 일치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즉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는 말은 '너희는 나와 전혀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험에 든다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거리도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도 아닌 것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그런 상태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민들이었던 것입니다.

잠자는 상태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외면해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외면해 버리고 오직 자기 마음에 있는 바를 좇아가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과연 예수님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두고 삽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리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죄에도 심판에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죄에 대한 심판에 긴장감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주님의 죽으심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어야 할 죽음을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시는 십자가에 대해서 깨달았을 것이고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실 때 여자들이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울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불쌍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능하게 십자가지고 끌려가면서 곧 죽어야 할 운명에 빠진 한 남자가 불쌍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짜 불쌍한 자는 예루살렘의 딸들이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장차 올 심판의 재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마지막 심판이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시급한지를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마지막 심판을 보고 울어야 할 처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문에 울지 않습니다. 그들 마음에는 심판에 대한 긴장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처럼 무엇이 시급한지를 알았습니다. 선지자도 심판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고되어진 심판을 마음에 두고 이스라엘을 바라보니까 그들이 너무 한심하고 답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아 깰지어다'라는 말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로 나오십니까? 예수님이 어떤 마음인지 관심 없고 선지자의 마음에도 관심 없고 심판에 대한 긴장감도 없이 다만 자신의 종교적 욕심에 의해서 교회를 찾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야 할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죄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는 다른 목적도 이유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외에 다른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 마음에 다른 것이 자리하고 있다면 결국 우리는 깨어있는 자가 아니라 잠자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에 대한 긴장감도 심각함도 없이 오히려 심판에 대해서 느긋하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살아가는 잠자는 자입니다.

17절에 "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잔을 마셔 다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비록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즉 예루살렘에서 죄를 씻고 구원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깨어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심판을 마음에 담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이사야에게는 이스라엘에 해방하여 편안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에게는 하루속히 예루살렘이 정신차려서 성전에서 제대로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십자가와 구원이 아니라 내 한 몸 편하게 사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걱정과 근심과 탄식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세상을 보시고 탄식하고 계신다면 과연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통일되지 못한 것 때문에 탄식하시고 걱정하시겠습니까? 통일이 예수님께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통일이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경제가 다시 회복되는 것이 예수님께 중요한 문제입니까? 경제가 복음입니까? 내 교회가 부흥되고 예배당 건축하는 것이 예수님께 중요한 문제입니까? 예수님께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를 제대로 증거할 수 있는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오직 죄에 대한 심판에만 마음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왜 망했습니까? 내 나라가 강해지고 복받아서 잘 사는 것만이 그들의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을 향해서 '깰지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무엇에 대해서 깨어야 합니까?

그것은 좋은 소식, 구원을 가져오는 소식에 눈을 떠야 했던 것입니다. 18절에 "네가 낳은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너의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속에는 지금의 환난과 어려움에서 건질 힘있는 자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즉 구원은 외부에서 주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21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은 구원의 좋은 소식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포로가 되어 잡혀갔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바벨론을 향해 붓겠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소식을 마음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만 마음에 두고 산다면 비록 포로 되어 있는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 속에 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심판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전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좋은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그분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염려될 것이 뭐겠습니까? 주님을 알게 되었고 죄용서 받았고 천국가게 되었는데 뭐가 부족하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삽니까? 항상 부족을 느끼며 삽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우리 마음에 두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문제보다는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더 관심거리고 중요한 문제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으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자는 상태입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깰지어다'라고 외치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마지막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사신다면 그 심판 속에서 구원받고 천국가게 되는 것만으로도 주님을 믿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들이 인생에 중요한 문제로 마음에 자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가 들어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감사가 들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들어있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심판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실체로 이 땅에 오셔서 피흘리신 주님의 피가 우리의 마음을 점령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피에 담겨 있는 구원의 소식이 여러분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자의 모습인 것을 잊지 말고 다시 한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점검하시면서 우리들 마음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다스려지기를 소원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