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힘 (사 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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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힘의 나라입니다. 힘을 기준으로 모든 가치가 판단되며 강자는 유능한 자로 대우받고 약자는 무능한 자로 치부되는 곳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든 일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힘있는 자가 대우받는 세상이기 때문에 자연히 사람들은 힘을 비축하고 소유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능하고 무시 받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자 하는 것도 결국 그 지식이 힘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잘 키우고자 하는 것도 역시 자식이 잘됨으로서 부모에게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고 크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자 하는 것도 큰 회사라는 것이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힘을 기준으로 비교하고, 힘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가 판단되는 세상에서 힘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힘을 포기한다는 것 자체가 미련하고 바보스런 짓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저는 '세상을 변화시키자'라고 외치면서 이런 저런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별 것 아닌 세상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입니다.

사 51:9절을 보면 세상을 '용'으로 표현합니다. 용이란 힘의 상징입니다.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힘이라는 사고방식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사단의 사고방식입니다. 힘있는 사람이 최고로 인식되며 힘있는 자만이 사람 행세할 수 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반면에 힘없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으로 전락된 채 온갖 설움과 눈물을 흘리며 살아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까지 있지 않습니까?

이런 세상이 변화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간이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심으로 살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고 해서 세상이 변화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셔야 한 것입니까? 아무리 인간이 윤리적으로 산다고 해도 결국 세상은 힘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윤리도덕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은 힘을 포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힘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신학교 갈 때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들어가지만 졸업을 하고 목회를 할 때는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었고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현실은 바른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아니라 유능한 목사를 원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끝까지 바른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무능한 목사라는 지적과 비난과 개의치 않겠다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도 유능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 교회를 키우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풍조입니다.

인생이 피곤하고 힘든 이유도 경쟁을 해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의 세상에 발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경쟁을 한다는 것은 피곤하고 힘들고 마음 고생이 되는 일입니다. 항상 경쟁자를 의식해야 하고 쉬고 싶어도 경쟁자 때문에 쉬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보다 좋은 것을 소유했을 때 '나는 왜 저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하는가?' '나는 왜 저 사람보다 돈이 없는가?' 이런 생각에 빠진 채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기 때문에 인생이 재미없어지는 것입니다. 남들이 뭘 가지든 말든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내 인생은 이것만큼 가지는 것이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남들처럼 멋있는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채 쓸데없는 싸움에 휘말려서 힘들고 피곤하고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1절에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라는 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시온은 곧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으로 또는 시온으로 부르신 것은 이스라엘이 곧 예루살렘이고 시온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시온, 또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부르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함께 거할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즉 말을 바꾸어서 말한다면 '영원토록 나와 함께 거할 내 백성들아 깰지어다'라는 의미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다시 한번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시온'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 즉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 이것이 신자된 우리들의 인생 목적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인생의 목적지를 분명히 정하지 못하고 썩어질 것에 불과한 세상에서의 인생을 더 소중히 여기고 세상 풍조에 빠진 채 힘있는 사람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잠자고 정신차리지 못한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네 힘을 입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여기서는 힘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추구하는 힘이 아닌 다른 힘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입어야 할 힘은 어떤 힘입니까?

시온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시온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전과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힘을 입는다면 그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성전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그리고 법궤에는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이 돌판은 모세가 직접 만들어서 하나님께 가지고 간 두 번째 돌판입니다.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서 직접 주셨습니다. 돌판에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은 말씀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말씀을 들고 내려왔을 때 이미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돌판을 던져 깨어버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을 만들게 되었는데 모세는 두 번째 돌판을 법궤에 집어 넣어버립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질이 없음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말씀을 다시 준들 결과는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법궤에는 속죄일 때마다 제물의 피가 뿌려집니다. 이것은 이제 이스라엘은 스스로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는 법궤가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힘을 중심으로 사는 나라가 아니라 법궤를 중심으로 법궤에 뿌려지는 피의 정신으로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법궤를 믿고 법궤를 의지할 때는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여리고성에서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실력을 의지하고 힘을 중심으로 할 때면 아무리 법궤가 있다고 해도 전쟁에서 실패하였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아이성에서의 패배입니다.

1절에 '할례 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은혜의 땅은 용서받지 못한 자는 들어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더러운 자이고 은혜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자이지만 그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입을 아름다운 옷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도 역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궤에 뿌려지는 거룩한 피라는 옷입니다. 그 옷이 이스라엘을 은혜의 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희생의 피가 이스라엘의 더러움과 모든 죄를 가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 받지 아니한 더러운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땅을 이스라엘은 누군가의 희생 덕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네 힘을 입을지어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라는 말은 법궤에 뿌려지는 피가 곧 힘이고 아름다운 옷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목적지가 시온성이라는 것을 안다면 오직 희생의 피를 힘입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목적지가 시온인 성도들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다같이 힘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힘을 원합니까? 세상에서 유능한 자로 대우받도록 해주는 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옷을 입는 힘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피의 흔적이 있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힘은 우리를 시온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힘이지 세상에서 복받고 잘살게 하시는 힘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힘을 구할 때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세상 풍조에 마음 뺏기지 않고 우리를 깨끗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힘'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눈에 보이는 세상이라는 현장에서 소유한 것을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지만 신자만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시온성이라는 곳을 마지막 목적지로 하고 성공과 실패를 판단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 시온성에 들어가는 자가 인생의 성공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인생을 산다면 세상에서의 성공이 결코 성공이 될 수 없음을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그 약속을 힘으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의 실체로 주신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럴 때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못 갈 곳이 없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인생이 전부다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남들이 천하게 본다고 해서 못할 직업이 없고 무시 받는 일이라고 해서 하지 못할 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체면이나 자존심이란 힘으로 사는 사람들이 힘을 포기하지 못했을 때의 자기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자는 은혜로 사는 인생이지 힘으로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은 예수님이고 아름다운 옷도 역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인생은 피곤하지 않고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으로는 아무 힘도 없는 예수님을 내 힘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힘을 의존해서 인생을 살지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큰 일은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 살고자 하는 자기 욕심을 정죄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는 분명히 인생의 최고의 성공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힘입고 살아갈 때 그 힘은 세상에서는 별 쓸모 없이 보일지 모르나 마지막 심판과 멸망에서는 여러분을 구출하는 놀라운 힘입니다. 이 힘을 의지하는 자는 자연히 세상 것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힘보다 더 위대하고 놀라운 시온의 힘을 입고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