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식 (사 5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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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이왕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였었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까닭없이 잡혀갔으니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할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을 관할하는 자들이 떠들며 내 이름을 항상 종일 더럽히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은 내 이름을 알리라 그러므로 그 날에는 그들이 이 말을 하는 자가 나인 줄 알리라 곧 내니라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지어다 너의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마치 무인도에 표류되어 있다가 지나가는 배에 의해서 겨우 구출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노래하는 분위기입니다. 사방이 바다로 뒤덮인 외딴섬에 혼자 고립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자기를 구원하러 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너를 구출해 줄 자가 간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은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기쁜 소식이며 기쁜 소식이란 복음을 말합니다. 즉 좋은 소식은 복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좋은 소식은 듣는 자들에게는 평화가 되고, 구원이 되고, 9절의 말씀대로 기쁜 소식을 발하며 함께 노래할 수 있는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오늘날 사람들은 좋은 소식, 즉 복음의 소식을 듣고도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보면 분명 좋은 소식은 즐겁고 기쁜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나는 복음의 소식을 듣고도 그와 같은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분명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좋은 소식을 들어도 기쁘지 않고 싱숭생숭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좋은 소식이 듣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준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구원해 준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 보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들으면서도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는 주된 이유는 구원을 단지 자신을 천국 보내준다는 뜻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나오면서부터 예수 믿으면 천국 보내준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에 천국 보내준다는 말에 식상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천국을 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어딘가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벗어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가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소식이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벗어난다는 것은 '구출'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구원이란 '구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출은 어딘가 갇혀 있는 곳으로부터 빼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고립되어 있는 무인도로부터 벗어나는 감격의 분위기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 백성이 이왕에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였었고 앗수르인은 공연히 그들을 압박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갇혀 있던 애굽에서 구출되는 것이었습니다. 또 압박 받던 앗수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그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소식이란 갇혀 있고 붙들려 있는 상태에서 빼내주겠다는 소식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소식에 진심으로 기쁨하고 즐거워 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갇혀있고 붙들려 있는 자들입니다. 내가 갇혀 있고 붙들려 있다는 것을 아는 자들만이 그 자리에서 자신을 구출해줄 소식을 기다릴 것이고, 그 소식이 들려질 때 기뻐하고 마음을 평화를 누릴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나는 갇혀있지도 않고 붙들려 있지도 않다.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무리 들려져도 결코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갇혀 있고 붙들려 있는 자신의 처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자유를 잃어버린 채 뭔가에 갇혀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나는 자유인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갈 3:22를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참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 속에 살아간다고 믿고 있지만, 성경은 인간을 전혀 다르게 판단합니다. 자유가 아닌 갇힌 자라고 말합니다. 속박 당해 있는 것입니다. 죄에 갇혀 있고 죄에 속박 당해 있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를 이길 만한 힘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붙들려서 끌려가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의지로 살아간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구출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이미 구출되어진 자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구출하신다는 좋은 소식에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인간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돈에 매어 있고, 직장에 매어 있고, 자식에 매어 있고, 체면에 매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고, 직장에서도 싫지마는 상사에게 굽실거리고 잘 보이기 위해서 아부해야 하고, 자식 때문에 자존심 굽히는 일들이 한두번이 아닐 것입니다. 놀러가고 싶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놀러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도 참아야 하고, 하기 싫은 것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자유인'으로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뭔가에 갇히고 붙들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죄에 갇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실체를 깨달을 때 비로소 복음이 좋은 소식으로 들려집니다. '내가 구출 받아야 한다'는 의식은 자신이 '갇힌 자'라는 것을 발견한 자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만 좋은 소식이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세상에 매인 채 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날마다 돈벌기 위해서만 열심이고 지옥이나 천국은 관심도 두지 않고 그저 내 인생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복음이 마음에 와 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점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을 진단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걱정에 매어서 신앙의 문제에는 관심이 멀어지고 돈을 더 원하는 자신에 대해서 미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 마음껏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갇혀 있는 자신의 상태를 미처 발견하지도 못하고 심각하게 여기지도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있습니다. 이 문제점 때문에 좋은 소식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서도 하나님과 눈이 마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8절에 "들을지어다 너희 파숫군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봄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시온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임을 말합니다. 즉 죄에 붙들려 있고, 사단에게 붙들린 채 멸망으로 팔려가야 했던 우리들을 흠없는 어린양의 피로 값주고 사셔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신다고 할 때 누가 가장 그 소식을 기뻐하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이 죄에 팔린 자임을 아는 자들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구출해 주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으로 팔려가야 할 자기 상태를 알고 구원자를 기다렸던 자들이 그 소식에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 그들의 눈이 마주본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들으면서 뭔가 하나님과 내가 일치되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때문에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자신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일치가 되고 있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평소 살면서 자신이 무엇에 갇혀 있고, 그런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신자만이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됨을 느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 때 그것이 부담이 되고 피하고 싶고 밀쳐 내고 싶은 마음입니까? 만약 후자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죄에 갇혀 있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전혀 심각함이 없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소식에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뻐할 사람은 죄에 팔린 자신을 미워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이고 탕자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가 죄에 팔려간 자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 모으는 것이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을 끌어다가 교인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런 말씀들을 예수님을 믿고 있는 여러분들이 들어야 할 이유가 뭐냐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안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돈에 매이고 세상에 매여 살아가면서 자신의 심각성을 모르고 그저 태평하게 자기 사는 것에만 열심들이기 때문입니다. 돈벌기에 열심이고 자식 키우는데만 모든 정성을 쏟아 붓고 살아가면서, 우리 죄를 씻기 위해서 죽음을 당하신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생활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팔려 살았던 자신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하시고, 이런 우리를 속량하시고 구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피흘리신 주님의 사건을 마음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온으로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과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소식이 여러분들에게 기쁨이 되고 평화가 되고 구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갈 때 여러분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