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믿었느뇨 (사 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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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나 교인들이 전도라는 것을 할 때 크게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설교나 전도가 누군가를 믿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더욱 잘 믿도록 하고 큰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설교가 필요하고, 안믿는 사람을 믿게 하기 위해서 전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설교하고 전도할 때 그 언어는 상대방의 이해를 촉구하기 위해서 구사되어지고 반발을 가져올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스스로 삼가하게 되어지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상식적인 생각에 앞서서 과연 성경에서는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외침, 그리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 앞서서 등장하셨던 그분들은 어떤 의도로 설교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는지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정확한 진단아래 설교하고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믿게 해서 자기 백성이 되도록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다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신 예수님의 활동은 대실패작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에는 능력도 소질도 없는 예수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구약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선지자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믿도록 하겠다는 의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믿도록 하겠다는 의도였다면 백성들 전체로부터 반발을 받고 화를 일으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믿게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면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이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구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죄에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이지 자기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라는 것도 역시 안믿는 사람을 믿게 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구별하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구별함으로서 자기 백성된 자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전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믿게 하겠다'는 것은 결국 성령의 일을 인간이 가로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성령이 오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자기 백성이란 성령 받을 자로 인침 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고, 믿음이란 성령이 오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설교는 인간의 지식과 상식으로서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말을 선포함으로서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 즉 성령 받은 자와 성령 받지 못한 자가 구별되어지도록 하는 시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남겨진 말씀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누가 심판 받을 자이고 누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구원받을 자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 남겨진 계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은 자는 들어도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말로만 가득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어두움의 시대에서는 행동과 성격, 성품 등 외형적인 것을 통해서 믿음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만 이해할 수 있는 계시를 이 땅에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내 백성을 구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그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구별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초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초월하지 못하고 집착해 버릴 때 결국 사람 숫자 늘어가는 것에만 재미와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고 한사람이라도 더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듣기 거북한 말은 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두움의 세상 속에서 구별의 기능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말합니다. '누가 믿었느뇨'라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는 믿도록 하기 위한 마음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 말을 누가 믿겠는가?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마음으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리 전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마음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전하는 것입니까? 설교하면서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을 것이고 이해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전한다면 참으로 맥빠진 설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구별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믿을 사람이 없다'고 간주하고 주어집니다. 계시를 전해도 믿을 사람이 없는데 왜 계시가 주어집니까? 그것은 계시를 믿을 자는 오직 하나님의 백성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계시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백성이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고 믿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이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자질이 주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서 믿도록 하셨다는 의미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고 전재하고 주어진 말씀이라면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말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교회 다니면서 예배에 충실하고 세례 받고 직분 맡으면서 교회에 충실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교인들은 믿음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가운데 믿음 아닌 것을 믿음으로 여기면서 천국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믿음 아닌 것이 믿음의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마지막때 예수님이 인정하는 믿음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구별되어 나타나는가를 직시하고 과연 오늘 나에게 그 믿음이 보여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에 '누가 믿었느뇨?'라고 말씀한 뒤에 우리의 전한 것의 실체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과연 그분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2절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참으로 참담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명색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고, 구세주로 오시고 메시아로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구태여 이렇게 참담한 모습으로 오셔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구세주, 메시아는 영웅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영웅이란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흠모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행운과 복이 아니면 소유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신의 도움이 아니면 가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들은 타인에게는 영웅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고 흠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영웅의 주위로 모여들면서 자신의 소망과 꿈을 이루어주기를 바랍니다. 영웅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언제나 영웅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탄생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국가와 나의 가정과 나의 행복한 삶이 그 영웅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단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흠모할만한 영웅적인 모습을 갖춘 목사를 찾고 그 목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고 믿는 가운데 자신의 복이 그를 통해서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흠모할만한 조건이 없는 목사는 목사로서의 자질이나 능력을 구비하지 못한 자로서 종교인들로부터 거부를 당하고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흠모할 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오셨다면 예수님을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은 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전혀 제공해 줄 수 없는 무능력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가 전혀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자 모두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는 흠모할 만한 모습도 없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님께 대해서 분노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흠모할만한 모습도 없이 오셨으면서 흠모하지 않고 배척한 것을 믿음 없는 것으로 책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백성을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흠모할만한 모습이 있는 자를 흠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러나 흠모할만한 모습이 없는 자를 흠모한다면 그것은 결국 외형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형을 보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은 세상에 흠모할 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나타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믿음에 대해서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외형을 보지 앓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믿음이라면 오늘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과연 나는 외형을 초월하고 살아왔는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풍채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이 오셔서 무시와 멸시를 당하셨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신자 역시 사람들이 흠모할만한 풍채나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려는 욕심에 대해서는 초월하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형에 대해서는 초월하시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는 쪽으로 오셨는데 정작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인기를 얻으려고 하고 사람으로부터 흠모를 받을만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애를 쓰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믿음의 참된 모습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 고난받으신 예수님, 낮은 자리에 오신 예수님'이라고 떠들면서 정작 자신은 낮아지는 자리는 외면하고 십자가 지고 고난받는 자리는 질색을 하고 거부한다면 진심으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흠모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세상은 모두가 자신의 외형이 뭇사람들에게 흠모를 받을만한 조건을 갖추는 것에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가기 때문에 외형을 초월한 채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을 자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오신 예수님을 배척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들이 믿음 믿음 하면서 예수님만 믿는 것처럼 떠들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진 채 있었던 인간의 실체일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신자는 자신의 외형은 초월한 채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사는 자입니다. 이런 신자는 이미 자기 외형을 초월했기에 남도 외형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외형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을 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나를 무시 받고 멸시받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예수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실체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예수님의 요구에는 전혀 동참할 뜻도 없이 오직 남에게 싫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을 가지기를 소원하며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성경 많이 본다는 흠모의 소리를 좋아했고, 기도 많이 한다는 흠모의 소리에 흐뭇해했고, 믿음 좋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애를 쓰는 모습은 아니었습니까? 바로 그러한 습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흠모할만한 모습이 전혀 없이 사람들로부터 싫어버림을 당할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흠모할만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기면서 교회로 찾아오는 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멸시와 무시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촉구하는 말씀이 아니라 신자와 신자아닌 자를 구별하는 말씀인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 시간 나 자신에게 신자의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