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인하여 (사 5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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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특히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신의 도움으로 모든 일이 만사 형통할 것이라는 기대 아래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을 하려고 힘쓰게 됩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행동인가?' 이런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서 하나님 마음을 흡족케 할만한 행동이 나올 수만 있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필요성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교인들이 이러한 착각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 이 삼자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뚜렷한 선이 그어져 있지 못한 채 아무렇게나 그저 입에서 나온 대로 하나님을 찾다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다가 하나님을 찾는 실정입니다. 그저 아무나 한 분만 찾으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도 연결되어 있고 예수님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그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성소의 휘장이 찢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지신 것으로 할 일을 다한 것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드셨으면 이제부터 예수님은 필요 없이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가면 되는 것입니까? 이런 모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께 나가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고, 생명은 예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복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할 자는 예수님밖에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인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항상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영생, 곧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자체가 영생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신자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 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오직 성경을 통해서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뭘 해야 교회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뭘 부지런히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이 증거 되고 예수님이 증거 되는 가운데 서로 아멘 하면서 마음이 하나될 때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아십니까? 아마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는 생각 가운데 교회를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머리에서 나오는 하나님은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머리로 발견하고 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세상에 계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압니까?'가 되어야 합니다. 역시 여러분은 '나는 예수님을 잘 안다'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분이다'는 것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는 요셉이고 어머니는 마리아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에는 30세부터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이런 예수는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조금만 가르쳐주면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은 과연 내가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점검하고 돌아가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 신가는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가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당할 일들이 700년 전에 이사야를 통해서 계시되고 있습니다. 찔림 받고 매맞고 상함을 입고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은 사람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인간에게 내 던져져서 그런 처참한 꼴을 당해야 했습니까?

본문에 보면 '우리'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우리의 질 고를 대신 졌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했고,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했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당하신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당해야 할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버림받음이 곧 우리들이 버림받아야 할 모습이고,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이 곧 우리들이 당해야 할 처참한 모습입니다. 즉 우리에게 부어야 할 진노를 예수님에게 부으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뭣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는 의도 자체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전혀 보지 않고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 믿음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참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참된 믿음은 주님이 당하신 모습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매맞고 질 고를 당하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내 죄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가 찔림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가 상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즉 주님이 창에 찔리시고 죽으신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치고 이런 얘기를 안 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을 몰라서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까? 그러나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앎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음을 몰라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몰라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자는 필연코 자기 죄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내 죄 때문에 죽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죄를 모른다면 그것은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안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죄라고 하니까 나쁜 행동이나 해야 할 것은 하지 못한 것들을 죄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아직까지 자기를 모르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 제가 욕을 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자신이 욕을 안 할 수도 있었는데 욕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자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욕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욕을 하지 말자'라는 결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가운데 나오는 죄입니다. 인간의 본질을 모르는 죄는 착한 행동을 할수록 죄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 자기를 알면 그 어떤 선한 행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예수 앞에서 더럽고 악한 인간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이고, 내 죄 때문에 십자가 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수없이 말하면서도 진짜 예수님을 아는 자가 희박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열매란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 됨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알게 된 신자에게서만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신자는 자연스럽게 삶도 행동도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신자로 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내가 죄인이고 나는 악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다 는 것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랑도 없을 것이고, 남을 무시하고나 업신여기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바로 더럽고 추한 자이고 약한 자이고 무시 받을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감히 누구를 무시하겠습니까? 이런 신자가 진짜 예수님을 아는 자이고 그 사람이 바로 영생 안에 있는 신자입니다.

주님을 알기 전에는 그래도 내가 괜찮은 인간이고 저 사람보다는 낫고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는데 주님을 알고 난 순간, 그리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주님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내가 바로 죄인의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어지는 그 사람이 제대로 예수님을 알게된 사람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죽으신 것이 귀할 수밖에 없고,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축복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귀함을 알았으니만큼 이제부터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해도 주님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기뻐할 수 있는 삶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자랑하지 못합니다. 직분을 가지고 목에 힘주지 못합니다. 목사들이 목사를 성직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목사를 섬겨라, 목사에게 순종해라, 목사를 도우라는 말을 하면서 신자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인격을 내세우면서 겸손한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은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고 자기가 죄인 됨을 아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인간이 죄인임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모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얼마나 악하고 못난 인간인가?'를 고백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해도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살아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영생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하신 모습이 바로 내가 당해야 할 모습임을 알 때 지금 주어진 우리의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 자격도 없는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할 수 있고,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내가 밥 먹고사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사는 신자야말로 세상 것이 있고 없고 에 상관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아는 가운데 이런 행복한 삶을 사는 신자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