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라 (사 54:1-8)

9809233793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길 고대합니다. 그 이유는 은혜만 주어지면 자신의 모든 걱정거리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만병 통치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앙의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은혜만 받으면 신앙적으로도 세상적으로도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을 얻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병통치약인 은혜를 받으려고 기도원을 찾아가서 목이 터져라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오늘날 신자라고 이름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절대로 어려운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시는데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서 그것을 해결함으로서 은혜를 받으려는 신념으로 가득한 채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은혜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끌어가는 힘을 말합니다. 은혜란 세상을 사는데 힘을 내게 하는 영양제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핍박받는 길로 끌어가는 힘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만 말하고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만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듯이 누군가가 은혜를 받았노라고 하면서 은혜 받는 자기를 자랑하고 세상 적으로 잘된 것을 은혜 받은 증거로 제시하고 은혜 받은 방법을 가르치면서 은혜를 세상과 연결시킨다면 그 사람은 단언하건대 은혜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오히려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사람들은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에 쓰여지고 있는 사단의 도구일 뿐입니다.

은혜란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을 믿고 따라갈 수 없는 분을 따라가도록 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신자는 은혜 받지 않은 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예수님을 말하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따라갑니다. 자기의 힘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그 사람에게서 왕노릇하며 끌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은혜가 임한 자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내 믿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고 있는 것뿐인데, 내 믿음은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음을 자랑할 수가 있습니까? 결국 믿음을 자랑하는 자도 은혜와 상관이 없는 자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세상의 성공으로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로 끌고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항상 사모해야 합니다. 결국 믿음이란 자기를 부인하는 길, 좁은 길을 가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은혜를 사모한다는 자체가 이미 은혜가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은혜가 왕노릇하는 자는 세상의 환경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의 소망과 힘은 돈에 있기 때문에 돈이 사라지면 당장 웃음도 함께 사라집니다. 만약 목사의 웃음이 교회의 부흥에 있었다면 교회의 사람 숫자가 줄어지면 그 목사의 웃음도 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목사에게 주님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없다고 해서 힘도 없어지고 기쁨도 없어진다면 결국 주님이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주님이 살아 계신다는 그것 하나 때문에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은혜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말합니다. 1절에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한 여인에게 '노래하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노래한다는 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과연 여인에게 있어서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는 형편이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환경입니까? 오히려 수치와 업신여김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옛날 우리 나라도 '칠거지악'중에 하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큰 걱정거리요 슬픔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노래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는 말입니다. 홀로된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 없는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여인의 자식보다 더 많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약속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까 너희들은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하는 가운데서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어떤 환경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슬픔의 자리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힘으로 신자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해서 수치와 멸시를 당한다고 해도 약속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노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즉 보이는 현실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약속이란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현실로 생각하는 보이는 것은 허상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보이지 않은 것이 실상으로서 약속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은 현재 눈에 보이는 허상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상을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믿음의 증거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내세우는 것은 모두가 엉터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하게 잘했더니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더라' '아침에 기도를 하고 하루를 시작하니까 손이 많이 오더라' '아침에 큐티를 하니까 복이 오더라'는 이런 모든 것이 믿음의 증거를 보이는 것을 통해서 찾는 믿음 아닌 모습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니까 보이는 것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집착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사라져 버릴 때 웃음도 기쁨도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보이는 것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기쁨과 평안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생토록 슬퍼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도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슬퍼하기도 하고 낙심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가 왕노릇하면서 주님께로 이끌림 받으며 사는 신자라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슬퍼하고 낙심하고 있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은혜로 살지 못한 자는 낙심되고 슬픔이 되는 일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게 되지만, 은혜로 사는 신자는 도대체 자기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낙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가지고 낙심하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믿음 없음을 한탄하면서 다시금 주님께 자신을 부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사람은 노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수가 있습니다. 즉 주님이 영원한 생수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생수를 얻어보려고 합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과 같습니다. 주님이 생수인줄을 몰랐을 때는 주님에게 생수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생수임을 알았을 때는 물동이도 내버려두고 주님을 증거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에서 하는 짓거리가 무엇입니까? 주님에게 생수를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돈이라는 생수, 좋은 직장이라는 생수, 좋은 대학이라는 생수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만 있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우물입니다. 예배당이 전세일 때는 조그만 해도 좋으니까 우리 예배당을 가지고 싶어합니다. 우리 예배당만 있으면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이 하지만 예배당을 짓고 나면 좀 더 큰 예배당을 짓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과연 채워지지 않는 우리들의 욕망이란 우물을 채우기 위해서 일하시겠습니까?

잉태치 못하고 생산치 못한 여인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노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이, 주님이 생수이심을 아는 자만이 세상 것과 상관없이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눈에 보이는 허상을 실상으로 봐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 주어질 세상의 결말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의 말씀도 세상의 마지막 결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세상에서는 남편 있는 여자가 자식을 많이 낳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여인의 자식을 굴복시킵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때 한가지 이상한 점은 홀로 된 여인이 자식을 낳을 수가 있느냐는 점입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말씀이 4,5절입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가 네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홀로된 여인의 남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결국 만군의 여호와에게서 난 자식이 세상 마지막 때 인간에게서 난 자식들을 굴복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즉 그냥 인간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어떤 권세와 부귀 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마지막 때가 되면 별 가치 없는 존재로 끝나 버리고 말 인생이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은 비록 세상에서는 수치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며 살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때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을 믿는 자는 세상 것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하나님이 남편 되어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낳아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식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새롭게 태어날 수도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남편 되어서 태어난 자식이고 구원받은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신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겠습니까? 오직 약속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약속에 의해서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임을 깨닫기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고 노래하는 신자로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때 이 약속의 자손만 모으십니다. 6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입어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소시에 아내 되었다가 버림을 입은 자에게 함같이 하실 것임이니라 네 하나님의 말씀이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부르셨다면 세상에서 우러러 보이는 자리에 세우실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6절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부르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버림받은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버림받은 모습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신자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참 아들임을 세상에 증거 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만 참아라고 하십니다.

7절에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이 우리가 비록 때때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진노하시는 듯한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진노가 아니고 버림이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멸망을 보여주고 참아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서 잠시 버림과 진노의 자리로 밀어 넣으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일 뿐, 하나님은 큰 긍휼과 영원한 자비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날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산다면, 비록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자리에 처한다고 해도 노래하는 신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고 오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하고 그 약속을 바라보고 사십시오.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낙심이 될 때 과연 그것이 낙심할 만한 문제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약속대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약속대로 긍휼과 자비로서 하나님이 남편 되어서 태어난 자식들을 모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흘린 눈물을 씻겨주시면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약속을 바라보면서 두려움 없이 걱정 없이 노래하며 살아갈 때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 약속의 자손임이 확인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