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 휼 (사 54:9-10)

9810073994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극히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재 대부분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잘못된 모습을 드러내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러한 심각성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위해서 뭘 했느냐?'고 다그치면서 오히려 신앙에 해가 되는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뭘 했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 해가 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뭘 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 자연히 자기 행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행위에서 예수님을 위한 것과 예수님을 위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됩니다. 구분의 기준은 교회 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에게서 예수님을 위한 행동이 보여질 때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일단 자기의 신앙에 대해서 안심을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행동이 보여지기 때문에 그것으로 '나는 신자다'라는 표를 삼게 되고, 신자라는 표가 있으니까 천국에 대해서 안심을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큰 문제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주어지는 것인데 은혜와 긍휼을 구원의 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를 표로 삼아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행동이 보여지지 않았을 때에는 자기 신앙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신자인가?'라는 불안에 빠지게 되고, 생활에 문제만 발생해도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벌주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에까지 의심을 하게 됩니다. 결국 이 사람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반문하기를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얻었으면 은혜와 긍휼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은혜와 긍휼로 사는 신자라면 분명히 은혜와 긍휼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와 긍휼이 어떤 식으로 드러나느냐가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은혜와 긍휼의 모습을 자기 멋대로 상상한 채 자기 힘으로 드러내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소위 착한 행동이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까 이제부터 사랑을 드러내며 살자'라는 이것이 어떻게 보면 신자다운 생각인 것 같지만 전혀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을 보여야지, 은혜와 긍휼을 드러내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회사에서도 '내가 무엇을 해야 사랑을 드러낼 수 있을까?'를 궁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러운 사무실을 청소하고 남이 하기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를 함으로서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게 됩니다. 내가 뭔가 보여주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자기 만족'입니다. 오늘도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흐뭇해하는 것만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은혜와 사랑을 우리의 힘으로 드러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스스로 그 모습을 나타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린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지 내가 은혜와 긍휼 자체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은혜와 긍휼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모든 자를 자신과 똑같은 자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까이 하셨던 사람들은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무시 받고 천대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무시 받고 천대받는 자의 편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편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무시 받고 천대받는 계층, 즉 창녀 세리 병든 자의 모습으로 전락해야 하다는 이상한 논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시 받고 천대받는 자들의 편에서 일하셨던 것은 세상을 향해서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 기준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기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자 했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긍휼'입니다.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만 가는 나라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무시 받고 천대받는 자들을 가까이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마음에 두고 사는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긍휼은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보다 못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이고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뭘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면 결국 나보다 못한 사람이 보여질 수밖에 없고, 나보다 못한 자가 보여진다는 그 자체가 이미 차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을 위해서 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가?'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이는 노아의 홍수에 비하리로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치 않게 하리라 맹세한 것 같이 내가 다시는 너를 노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홍수로서 세상을 멸망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노아에게 약속하기를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그 마음에 계획한 바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선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노할 사람에게는 노하시고, 상줄 사람은 상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멸망당해 마땅할 죄인이지만 노하지 않고 책망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노와 책망은 예수님이 다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노와 책망을 예수님이 다 짊어지셨으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만 믿으라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를 보지 말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 지신 그분만 바라보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심판의 기준입니다. 행위가 심판의 기준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긍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치 않은 것, 이것이 세상의 심판 기준이 됩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오직 긍휼로서 일하실 뿐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행위를 보면서 스스로 만족해하고 안심하며 살아갑니다. 행위가 있기 때문에 구원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하고 있는 것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긍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행위를 보면서 손뼉 치고 기뻐하고 있다면 그 순간 하나님의 긍휼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신자는 자신의 행위를 내어놓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긍휼만 그대로 내어놓으면 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사람들은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해서 긍휼과 자비를 내어놓으려고 합니다. 평소에 교회도 잘 다니고 신앙생활에 별 문제가 없는 사람은 아무런 갈등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 산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잘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나는 신앙 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산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이 엉터리인데도 날 사랑하실까?'라는 의심과 불안이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10절에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이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산들은 옮기실지언정 하나님의 인자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언약도 옮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변의 하나님이십니다. 처음부터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사랑하셨으면 행위가 나빠졌을 때 사랑도 옮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위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잘못한다고 해서 은혜를 거두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지옥 가는 이유는 나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가 지옥 간 이유는 예수님을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판 자기 행위를 보고 마음에 뉘우침이 있고 고통스러워했지만 그런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자신의 행위를 보게 되면 스스로 이런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신자다운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신자다운 태도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주님의 긍휼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행동을 보지 않는다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끝까지 행동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의도를 그대로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긍휼로 천국에 가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라고 말씀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행동을 보지 않으니까 착한 일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뭘해도 자기 행동을 보지 말아라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착한 일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 앞으로는 착한 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착한 일을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되, 내가 한 착한 일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착한 행동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게 되면 내 옆에 착한 일을 하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는 불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역시 옮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자신의 행동에 신경을 쓰다보니까 수시로 변하는 내 행동에 의해서 마음도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교회에 안나온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못나가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고 긍휼을 의심해 버리면, 결국 그것이 믿음이 없는 모습이고 그 불신 때문에 지옥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또 '신목사는 교회에 안나와도 된다고 했다'라고 곡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교회에 안나와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안나온다고 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변화하지 않습니다. 행위를 보시고 덜 사랑하고 더 사랑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불변의 사랑과 긍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이고 소망인 것입니다. 나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이 오늘도 우리를 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