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언약 (사 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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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스스로 복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함정은 '나는 잘 안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주어질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부터 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잘 아는 문제에서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쉽게 넘어가 버리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중심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도하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이고 계시입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를 삭제해 버린다면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현대의 신자들의 관심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과연 그리스도의 피에 모든 관심을 집중한 채 성경을 들여다보고 설교를 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사실 목사의 입장에서부터 곤란하기 짝이 없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광대한 범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학문은 범위가 넓습니다. 어느 한 분야를 공부할 때도 한가지만 알아서는 안되고 그 분야의 모든 것을 다 배워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렇게 넓은 범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목사들이 무엇을 설교할까 고민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넓은 범위를 평생토록 하나하나 가르쳐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많은 것을 다 배워야 십자가를 알게 되고 천국간다는 결론이 됩니다.

사실 목사들이 '무엇을 설교할까?'라고 고민을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위 교인들이 잘 아는 문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문제를 설교하기가 이제는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문제를 설교하려니 설교하는 당사자도 힘이 없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흥미가 사라지고 하품만 합니다. 그것을 보는 목사는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 소위 설교거리를 찾느라고 애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환경 운동, 선교, 도덕, 교회 건축, 정치, 이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교인들이 관심을 둘만한 것을 제공해서 교회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평생을 두고 배워야 할만큼 범위가 넓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저주받고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해 버리는데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내가 죄인인 것도 알고, 예수의 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도 믿는다'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으로 십자가를 믿고 있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결국 십자가를 믿고 있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음을 알고 있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도 다 알고 있는데, 설교할 때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과연 그 말에 관심을 가지고 마음 깊이 새겨들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인간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왜 인간이 스스로 예수를 믿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 낱낱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는 온 세상의 학문과 지식 등을 총동원을 해도 알 수 없는 비밀이며 신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범위한 세상의 학문도 초월해버린 것이 십자가입니다. 광범위한 학문을 가지고도 알 수 없는 십자가라면 십자가는 학문의 범위를 초월한 채 존재하는 하늘의 비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를 교회에 와서 듣고 내 입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나는 다 안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잘 알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잘 안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려고 하지 말고 '잘 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시작해야 합니다.

소위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목사의 위험성도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복음만 설교하고, 교회 부흥에도 욕심을 두지 않고, 오직 주님만 가르친다'고 해서 '나는 믿음이 있는 목사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사는 복음을 전하고서도 '내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교회 부흥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나는 교회 부흥에 관심 안둔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나는 과연 주님만 사랑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마음에 두고 '내가 주님만 사랑하는가?'를 점검하면 자신이 복음만 전하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답을 쉽게 내려버릴 깃입니다.

모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는 주님만 사랑하는가?'를 생각할 때, 결국 주님만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고, 그런 가운데 '역시 나는 주님의 피로 천국 가는 무능하고 못난 인간이다'는 것을 다시금 마음에 새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고, 수욕과 침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는 분입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말한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다 받는 분입니다. 이분이 우리가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우리의 신랑이 되는 분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신랑의 진짜 신부될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오직 신랑 하나만 바라보고, 저분과 함께라면 평생을 같이 침뱉음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고 멸시와 천대를 받고 뺨을 맞아도 괜찮다는 사람이 진짜 예수님의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놀라운 것은 신력의 자격도 없는 우리를 신랑 되신 예수님은 신부로 인정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신자는 용서해 주심을 알고 용서에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주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믿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 주시는 사랑에 이끌려 나오는 것입니다. 용서를 믿어버리면 '용서해 주니까'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란 주님의 사랑에 이끌려서 나오는 자라는 깃을 잊으면 안됩니다.

분문 1절에서도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거치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말씀합니다. 물은 목마른 자가 찾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찾지 않는 이유는 목이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시면서 돈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즉 공짜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도주와 젖을 사지 않는다면 포도주와 젖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고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포도주와 젖은 가나안 땅의 산물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는 맛도 보지 못했던 것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야 먹게 되었습니다. 즉 포도주와 젖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포도주와 젖을 좋아하고 그것을 사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자일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우레가 하나님의 은혜에 목말라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주와 젖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켜줄 애굽의 것을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알고 복음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목마름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의 관심은 단지 평생토록 육신의 목마름이 없이 물 길러 오는 수고를 하지 않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 관심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수를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육신의 탐욕을 해결해 줄 생수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 죄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생수를 알았을 때 물동이도 던져 버린 채 마을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목마름이 없다는 깃은 죄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무서움, 죄의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다만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지셨다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지만 여전히 자신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죄라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목말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목말라 하면서 그러한 내가 예수님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온통 세상 것에 목이 말라 있고, 그 목마름을 세상 것을 소유함으로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아오겠습니까? 십자가에 대한 목마름이 없기 때문에 돈없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양식 아닌 것, 배부르게 못하는 것을 위해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즐거움을 얻을 기름진 것, 좋은 것은 주님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들은 주님으로 인한 즐거움보다는 내 배를 위해서 엉뚱한 것을 얻기 위해 힘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마치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오히려 주님이 우리들의 그런 소원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죄의 심각성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대해서 목말라하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아무리 말을 해도 시큰둥하게 대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죄인임을 안다고 하면서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되었다고 하면서 죄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죄의 해결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고, 죄의 심각성을 안고서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목마름으로 나아갈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나아오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도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 말씀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나아와 들으면 영혼이 산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나와라' '들어라'라고 한다고 해서 스스로 나오고 들을 인간이 아닙니다. 오직 죄를 앎으로 예수님의 피에 목마른 자들만이 나오게 되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만이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입니다.

영원한 언약이 무엇인가는 다윗에게 허락하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면 됩니다. 삼하 7:27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인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 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우시겠다는 것 때문입니다. 집은 곧 성전이고 성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시겠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미리 내다보고 감사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그 집으로, 즉 예수님으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에게 허락한 은혜, 즉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의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영원한 언약에 의해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몸이 되고 영생이라는 영원한 복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젖을 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되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포도주와 젖보다 애굽의 산물에 더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새로운 인간으로서 영원한 언약으로 오신 예수님께 목말라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죄를 용서하시고 돈없이 값없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신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를 안다면 그 사람은 그 은혜와 사랑에 이끌려서 주님께 가까이 하려고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