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으라 부르라 (사 55: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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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믿음은 믿는 것인가 믿어지는 것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믿음이 가능하다는 차원에서 생각하면 분명 믿음은 믿어지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를 향해서 '믿어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믿음의 주체를 인간으로 내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믿어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믿어진다'라고 할 때 믿음을 위해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동원해야 할 방법도 없으며 대책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며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음'이라는 것도 자신의 종교 행위를 근거로 해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즉 남들보다 뭔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 없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뭔가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위대한 행위를 이끌어 내는 힘으로 여깁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면서도 구제를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하고, 십일조도 철저히 하고, 주일은 예배에 빠지는 적이 없으며, 예배시간 30분전에 나와서 기도와 찬송으로 준비하고, 바쁜 대도 불구하고 교회 일에는 빠지는 적이 없고, 성가대 교사 등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서 남보다 배는 더 수고하는 그런 모습을 믿음이 있는 행동으로 여깁니다. 믿음이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성경 말씀이 무색해 질 정도로, 인간들이 감탄할 만한 믿음을 얼마든지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영웅적인 행동을 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가게 하는 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다른 것에 마음 뺏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만 따라가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믿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행위라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행동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불안해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봐야 안심하고 편안해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도 자신의 행동에서 발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앞에 놓여진 걸림돌입니다. 교회는 행위를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행위는 십자가 앞에 놓여진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고 그 행위를 믿음의 증거로 삼으면서 살아왔던 사람에게 행위를 치워 버린다면 혼란스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하던 것이 사라져 버릴 때 그 당황함은 무척 큰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십자가만 믿음의 증거로 삼으면서 살았던 사람은 행위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변함없이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자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무엇을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 덕분에 복을 얻을 수 있을까? 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무엇을 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겠다는 발상이 엄청난 잘못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6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설교하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를 새벽기도회가 아니면 철야기도회 등으로 인용을 해버립니다. 즉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와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철야기도회도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이니까 빠지지 말고 열심히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목사들이 교인들을 교회에 끌어다 놓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다'는 것을 외부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열심이 있고 활동적인 모습을 통해서 목사 의 능력을 과시하고 그것을 내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와 숨바꼭질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딘가에 숨어 계시고 우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린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분명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우리가 가까이 할 수도 없는 분으로 말씀합니다. 실제로 여호와를 가까이 하거나 본 자는 다 죽습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를 만날 때가 있고 가까이 할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만날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여호와를 우리가 가까이 하고 만날 수 있을 때가 언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만날만한 때, 가까이 할 수 있는 때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 때가 주어질 때 여호와를 찾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가 언제입니까? 3절에 보면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확실한 은혜, 영원한 언약이란 '그'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누구십니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장치는 성막이었고 제사였습니다. 피가 뿌려지는 성막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성전이고 성전은 곧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보내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으시면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구원이란, 죄인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인간 된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치로서 성막과 제사를 세웠고, 그것이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요 1: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 1:1절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분은 하나님이고, 땅에 오셨던 분은 예수님이라고 구분 지어서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굳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요한복음의 시각에서 보면 땅에 오신 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가까이 할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만날 수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육신으로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지 않으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그렇다면 6절에서 말하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 가까이 계실 때'란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 그때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를 이미 700년전인 이사야 시대에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오신 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그를 찾고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그를 찾고 부를 때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영원히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언약이며 확실한 은혜입니다.

그러면 '찾으라 부르라'고 말씀하는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찾는 것이고 부르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찾으라 부르라고 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찾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는 것만이 찾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7절에 보면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여호와께로 돌아가고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악인의 길과 불의한 생각을 버린 자입니다. 악인의 길과 불의한 자의 생각이란 곧 인간의 길과 인간의 생각을 말합니다. 즉 자기의 길과 자기의 생각을 버린 자가 여호와께로 돌아가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길과 자기의 생각을 버리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길로 가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돌아온 자이고 하나님께 나아온 자입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오기 위해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온 자로서, 하나님을 만난 자로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자기 길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 주님이 사셨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는 이미 하나님께 나온 자입니다. 이것을 산제사라고 말합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다시 산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는 것은 내 길과 내 생각이 버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산다면 내가 곧 그리스도로 다시 산 것이 아닙니까?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예수님을 길을 가고 예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서 스스로를 이 땅에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증인된 신자는 세상에서 주님이 당했던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길에는 핍박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피하면서 주님의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길고 내 생각이 버려지지 않고서는 주님의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8,9절에서 말씀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합니다. 즉 이 세상은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핍박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면 그 속에 틀림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헛되이 끝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1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그냥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땅을 적시고 싹이 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고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주는 일을 이루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냥 헛되이 하늘로 가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세상에 오셔서 그 결과로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을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내 길보다는 주님의 길을 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말씀이 일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말씀이 일하고 있음을 안다면 내 뜻보다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맡겨서 인도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나아온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충돌되는 것은 우리의 계획이 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내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맞지 않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걱정 고민도 모두 내 계획대로 안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면 말씀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말씀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고 부르며 나아와야 할 것은 십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따로 이루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우린 다만 완전히 이루어진 말씀의 완성체인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면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의 길과 자기 생각이 버려진 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인생에서 스스로 뭔가 이루어 보려고 애쓰지 말고 주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가 내 인생이 되도록 해달라고 찾고 불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말씀한 대로 기쁨으로 나아가고 평안히 인도함 받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