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 (사 56:1-8)

9810284197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만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그들만 구원하신다는 의미의 용어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만이 참된 여호와고 그 외의 하나님은 다 가짜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마다 나름대로의 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다른 종교의 신이 다릅니다. 모든 종교의 신은 보편적으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보호하고 지켜주며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선택과 약속으로 등장하십니다. 세상에 그 어느 신도 선택과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오직 자기들만이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약속을 의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연히 발생한 국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애굽이라는 국가를 친 결과로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는 필히 애굽을 치고 건져낸 국가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이라는 시각이 아니라 그냥 '이스라엘'만 생각하게 되면 결국 이름만 이스라엘뿐 애굽적인 요소는 그대로 간직한 이스라엘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적인 요소와 결별한 이스라엘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애굽적인 것과 결별된 상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본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애굽적인 요소를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새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은 오히려 애굽적인 것을 도와주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애굽을 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애굽적인 것을 도와주는 하나님은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냐?'는 것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가지고 멋대로 추론해서는 곤란합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구약의 참된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이냐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탄생된 나라입니다. 애굽과 같이 이스라엘도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할 인간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생존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집단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윤리와 도덕적으로 남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실체, 즉 어린양의 피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어린양의 피라는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고, 이것을 가리켜서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참된 교회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어린양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시각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된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국가들은 각기 자기들 나름대로의 시각이 있습니다. 음식이나 문화 등에 있어서 모든 나라가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개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국가 안에서도 개개인이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때문에 자기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보게 되면 나는 맞고 저 사람은 틀리다는 결론을 내려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세상에는 특정 시각을 가지고 '이것이 옳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의 시각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러나 오직 신에 대한 시각만큼은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 그분만이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라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애굽에서 건짐 받은 이스라엘의 시각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불변의 원칙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의 시각에서 하나님을 찾을 때 그 하나님은 분명 가짜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자기 시각 버리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안식일'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주일 성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 '주일'은 이스라엘의 시각이 아닙니다. 현 교회에서 말하는 주일 성수는 날에 그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주일인가?'라고 물으면 새벽 0시부터 저녁 11시 59분 59초까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은 시간에 중요성을 두고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이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 구출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믿는 믿음의 표로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표현의 방법이 안식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실 때 안식일이 포함된 것은, 모두가 창조주이시고 애굽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노동을 안하는 것도, 단지 안식일이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노동을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표시로 노동을 그쳤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왜 하나님이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를 생각하고 그 뜻을 되새기는 가운데 노동을 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 교회들이 말하는 주일성수는 어떤 것입니까?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묵살해 버린 채 다만 주일이라는 한 날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안하고,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물건을 사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주일이라는 한 날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일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버린 것입니다.

주일성수를 강조하면서 그 법을 따로 정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일성수에 소극적 방법과 적극적 방법을 구분해서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안식일을 범해도 정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말합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나 간호사, 발전소에서 당직하는 사람, 시민의 교통을 위해서 일하는 운전사들, 군인들과 경찰관,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일을 범해도 정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교회 편한 대로 면죄부를 남발하는 것이 아닙니까?

2절에 보면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거룩한 주일을 더럽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주일이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주일이 더러워진다면 주일의 어디가 더러워진다는 것입니까? 결국 주일이라는 날, 즉 시간이 더러워진다는 뜻인데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더렵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시간이란 다만 해가 뜨고 지는 과정 속에서 변화하는 자연을 통해서 세월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느낌을 하루 24시간으로 정리하여 구분하여 놓은 것이 지금의 시간입니다. 이런 시간이 과연 어디가 어떻게 더러워진다는 것입니까?

따라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날을 더럽히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안식일에 담겨 있는 천지창조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더럽히는 것은 안식일이란 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 연합했다는 것은 2절에 나온 대로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고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한 사람을 말합니다. 즉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안식일을 지킨다면 하나님이 그를 영생이 있는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4-7절까지가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6,7을 보겠습니다.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는 말씀에 보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게 하실 때도 하신 말씀으로서 중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만민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즉 누구라도 안식일을 지킬 경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집,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데, 무엇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안식일을 날이라는 의미에서 날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날에 대해서 구분을 둬야 합니다. 즉 일곱째 날이 뭔가 다르다면 날에 있어서 차이점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날에는 서로 다른 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못한 시간으로 구분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일이건 주일이 아니건 날은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주일이라고 하니까 마치 날이 뭔가 다른 것처럼 느낄 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기념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날이 되면 다른 날보다는 뭔가 다른 특별한 날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한 날이 다른 날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인간의 느낌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안드리면 그 날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감도 모두가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무엇이고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안식일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날로부터 시작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날입니다. 그럴 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믿음을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보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다는 것이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노동을 하지 않은 이유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만 지킬 수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만 안식일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민족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시각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안식일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오직 주시는 은혜대로 살아갈 뿐이다는 믿음은 팽개친 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으면서도 주일에 예배드리고, 일을 안하고 물건을 사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그런 안식일은 성경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노동을 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안식일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는 참된 이스라엘은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수 있지 결코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옛날 이스라엘의 시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서 '새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날이 아니라 '과연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날입니다. 안식일에 '이것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은 아직 날에 매어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일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피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날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 날이 주일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면 그것이 곧 주일이고 주일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지킨다 못지킨다는 차원에서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로 족한 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항상 부끄러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주일을 사는 것이고 참된 이스라엘 모습입니다.